통일독일 청산작업 “이정표”/구동독 국경수비대원 유죄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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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베를린장벽 탈출 총격은 “살인행위”/사법부서 구동독 국가로 인정안해
독일 베를린지방법원은 20일 구동서독분단이후 2백명이상의 희생자를 냈던 베를린장벽 탈출자 사살사건과 관련하여 사상 처음으로 구동독 국경수비대원 2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베를린 지방법원은 지난 89년 2월5일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20대 구동독청년 1명을 사살한 사건과 관련,당시 동독국경수비대원이었던 잉고 하인리(27)를 살인혐의로 3년6개월형을 선고하고,또 다른 수비대원인 안드레아스 쿠엔파스트(27)에 대해서는 살인미수혐의로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내렸다.
이날 판결은 동종 사건수사가 3백여건이나 진행되고 있는등 아직도 진행중에 있는 통일독일의 과거청산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이정표적 조치일뿐 아니라 유죄판결대상이 총살명령을 내린 공산당간부가 아니라 일반 병사라는 점에서 항의를 유발하는등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날 법원의 선고량은 검찰의 구형량보다 많은 것이란 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단호한 의지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날의 선고는 특히 통일독일의 사법부가 구동독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은 첫번째 판결이란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 전인 지난 89년2월5일밤에서 6일 새벽사이. 당시 크리스 게프로이라는 20세난 구동독청년이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다 동독국경수비대요원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날 게프로이는 37m의 거리에서 하인리히가 발사한 칼라시니코프 소총의 총탄에 심장을 관통당해 숨졌다.
구동독의 법으로선 당연히 이 사건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자에게는 합법적으로 사살까지도 허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베를린지방검찰은 이 사건의 피고인 당시 구동독국경수비대요원 4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지난해 9월 기소한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구동독의 법률,나아가 구동독이란 국가를 어떻게 봐야하는가의 문제로 검찰·변호인은 물론 법률학자 사이에서도 상당한 법리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변호인측은 구동독이 통일되기전까지는 엄연한 주권국가였던 만큼 피고인 4명이 주권국가인 구동독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발포한 것은 아무런 잘못이 되지 못한다며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검찰측은 자유를 찾아 서베를린으로 도망치는 시민에 대한 발포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옳지 않은 것이 자유민주국가의 법정신인만큼 피고인들은 당연히 이처럼 위법적인 발포명령을 거부했어야 하며,따라서 이 명령에 따라 시민을 사살한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재판부는 선고이유를 통해 『37m라는 짧은 거리에서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는 시민에게 조준사격을 해 즉사하게 한 것은 보다 많은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처형」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구동독의 법률에 따라 피고인들이 행동했다는 변호인측 주장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정의와 불의를 가름하는 국가의 권한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면서 『망명자에게 발포를 명한 법률은 복종할 가치가 없다』라며 구동독의 법률,나아가 구동독의 국가 실체를 부인했다.
이날의 선고결과에 대해 피고인측은 즉시 항고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상급심에서 이번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번 판결은 모스크바주재 칠레 대사관에 도피중인 에리히 호네커 전동독국가평의회 의장이나 에리히 밀케 전국가안전부(슈타지)책임자등 구동독 지도부에 대한 사법처리에서 원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잘못된 과거(구동독)에 대한 분명한 청산을 천명한 것으로 지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나치전범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역사적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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