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국민투표 대신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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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여곡절 끝에 정치부패를 둘러싼 현안이 대충 정리되고 있다. 대선자금은 검찰이, 대통령 측근 비리는 특검이 맡아 수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 가지 문제만 남았다. 측근 비리와 관련된 대통령 재신임 문제다. 청와대도 은근히 고민인 모양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사실상 재신임 국민투표는 위헌이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이제 와서 국민투표를 고집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공식 천명한 사항을 안 하겠다고 하기도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권이 합의하면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하지만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약속을 몇몇 정당이 좌지우지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문제의 측근 비리는 그대로 있는데 대통령이 책임질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 재신임 문제 연내 결말 내야

그러나 이 문제도 올해 안에 결론을 내리고 넘어가는 게 옳을 것이다. 어정쩡한 상태로 대통령의 발목이 계속 잡혀 있어서도 안 되고 잠재적 정국불안의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대통령이 스스로 "국민투표는 위헌이므로 철회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먼저 정부 내 법률기관인 법무부와 법제처가 재신임 국민투표의 위헌 여부를 검토해 '위헌'이라는 결론을 대통령에게 공식 보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보고에 따라 대통령이 철회를 공식 선언하면 된다. 이 문제를 이렇게 오래 끌어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도대체 세상의 어떤 정부가 두 달이 되도록 자기의 주요 정책이 위헌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있을까.

국민투표를 하지 않는 대신 盧대통령이 꼭 할 일이 있다. 국민투표는 하지 않되 국민의 재신임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 근신이다. "국민을 볼 낯이 없게" 한 측근 비리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의혹이 커져가고 있다. 처음 문제가 된 최도술씨뿐 아니라 강금원(姜錦遠).선봉술.이광재씨 등 다른 측근의 문제까지 불거졌다. 그렇다면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에게 더욱 미안하고 전보다 더 언동을 조심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문제가 된 측근과 자기의 관계를 솔직하게 국민에게 밝히는 게 도리다. 예컨대 최도술씨가 11억원을 받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든가, 자기와 막말을 하는 사이라는 姜씨와는 실은 이러저러한 관계라든가 하는 얘기를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盧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그런 근신과는 거리가 먼 언행이 잦았던 것 같다. 특검법안을 거부한 것부터가 그렇고 야당의 단식.장외투쟁이란 비상국면을 맞고서도 국무회의에서 개와 고양이 얘기를 한 것도 그렇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곳" "앞으로는 충청도 시대"라는 등 지역주의로 오해받을 발언을 한 것도 근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둘째, 측근 비리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다. 주변에 비리를 저지른, 또는 저지를 것 같은 인물이 더 없는 게 확실한지, 주변과 친인척에 대한 감시.견제장치는 충분한지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수시로 위법시비를 빚는 노사모의 일부 행위도 자제시켜야 한다. 일부지역에서 대통령의 측근이 구설에 오르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대통령의 측근 관리방식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가뜩이나 콧대 높은 강금원씨와 대통령이 부부동반 골프를 친 것은 대통령 스스로 그의 콧대를 더욱 높여준 일이었다.

*** '절실한 심정'으로 국정 쇄신을

셋째, 재신임을 말하면서 약속한 국정쇄신을 빨리 단행하는 일이다. 마침내 12월이 왔다. 국정쇄신을 할 때가 됐다. 측근 비리로 국민에게 미안한 심정이 정말 절실하다면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답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 나은 국가경영, 더 나은 정부서비스뿐이다. 그런 절실한 심정으로 정부 요직을 개편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인적쇄신을 총선전략 또는 미니여당의 수혈용 차원으로 활용한다면 국민이 감동할 리 없다. 그리고 개편 폭이 크면 굴복이고, 작게 개편하는 것이 자존심을 살리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있다면 그 역시 잘못이다. 문제는 폭이 아니라 대통령의 인식이고 '쇄신'이다. 盧대통령이 재신임 문제를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현명하게 처리한다면 자기와 나라에 다 같이 복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 문제마저 전술적.기교적으로 넘어간다면 측근 비리에 대한 책임마저 실언(失言)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