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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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엄마로 둔 아이들은 알 것이다. 한순간, 그리고 다음 순간, 엄마가 얼마나 아줌마스러웠다 작가스러웠다 하는지. 엄마는 내가 오래도록 생각해볼 말을 던져놓고는 하품을 하더니 "아아, 내일은 꼭 세수하고 자야지" 하고 말했다. 이것도 엄마의 특징 중의 하나인데, 언젠가 엄마의 강연을 따라간 적이 있었을 때도 엄마는 이 말을 했다. "미용 비결은 뭔가요?"하는 짓궂은 질문에 엄마는 태연하게도, "제 피부 미용의 비결은 술과 담배 그리고 '내일은 꼭 세수를 하고 자야지'하는 굳은 결심이에요" 했던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기 전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었다. 엄마는 그러고도 밤이 되면 막내가 이를 닦았는지 검사를 하고, 우리에겐 샤워를 못 했으면 하다못해 손발이라도 닦고 자라고 잔소리를 해대고, 그러고는 아마 자신은 방에 가서 몰래 주먹을 쥐고 다짐할 것이다. "아아, 내일은 꼭 세수를 하고 자야지"라고. 나로 말하자면 그런 엄마가 신기하고 가끔은 귀여웠다. 그런데 그런 엄마도 가끔은 울상을 하고 말했다.

"전화기도 없고, 이메일도 없고, 써야만 하는 원고도 없는 곳으로 가서 1년만 살았으면 좋겠어. 누가 불러도 응답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이야. 하루 종일 남이 차려주는-이 대목이 엄청 중요한 거야-맛있는 것 먹고 책 보고 뒹굴방굴하면서."

나는 며칠 전부터 내게 일어났던 일을 엄마에게 말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는 어떤 남자가 좋아?"

"남자?"

엄마는 난데없는 질문이라는 듯, 잠깐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돈 많고, 키 크고, 잘 생기고, 머리 안 벗어졌으면서 배도 안 나오고, 친절하고, 유머러스하고, 따스하면서 냉철하고, 책 많이 읽고, 신중하고도 부지런하면서 오직 엄마만 사랑하는 한 남자…" 하다 말고 깔깔 웃었다.

"키아누 리브스의 외모에 빌 게이츠의 머리와 재산, 그리고 간디의 도덕성을 갖춘 그런 사람…. 엄마 주변엔 간디와 빌 게이츠를 닮은 남자들이 많이 있어. 문제는 조합이야. 빌 게이츠의 외모에 간디의 재산을 갖춘 남자들이 거의 다거든…. 그런데 왜 갑자기 남자는 물어?"

"그냥…. 나는 가끔 엄마가 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거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연애도 하기 싫어. 내 여자라고 생각하면 또 간섭할 거 아니야. 더 이상 너는 이렇게 나쁘고, 너는 이렇게 모자란다, 라는 말을 그게 맞을까 아닐까 생각하면서 내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

엄마는 손톱 거스러미를 입으로 잠시 뜯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리고 잘 안 될 것 같아. 남자라면 신물이 난다, 이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만났던 남자 몇을 두고, 남자는 다 그래, 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감정이 안 생겨. 머리보다 마음이 내 말을 잘 안 듣는 걸 어떻게 해?…그래도 엄마는 연애는 절대 안 해, 이런 말은 절대로! 안 할 거야."

엄마는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말했다. 주먹을 불끈 쥐는 듯한 자세였을 것이다. 엄마는 늘 그런 결심을 했다. "내일은 꼭 세수를 해야지"서부터, "이제부터 너랑 말 안 할거야", 혹은 "정말 아침 굶고 점심 굶고 저녁은 물만 먹어서 5킬로를 빼고 말 거야"라든가. 그러고는 나를 보면, "살이 너무 쪘다, 좀 굶고 살 빼라 응?"해놓고는 맛있는 걸 차려두곤 먹지 않는다고 성화를 해댔다. "살 빼라며?" 내가 물으면 엄마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더니 "이것만 먹고, 먹고 빼자! 글구 운동을 해야지. 어린 애가 굶으면 어떻게 해?" 이러는 거였다. 운동이라면 엄마는 숨쉬기밖에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엄마는 젊어서 민주화 운동을 하도 많이 해서 좀 쉬어야 해". 뭐 이런 소리를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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