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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80년대문화계시련(28)|5공의 금서갱유 이념서적수난시대|「민중」이란 말있으면"자동금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출판탄압」하면 즉각 금서가 연상된다. 책의 판매금지 조치는 출판탄압의 대표적 형태인 만큼 그 역사도 오래다.
『호머의「일리어드」「오디세이」는 미성숙한 독자를 현혹시키므로 한권도 남김없이 없애야 한다.』 BC387년 그리스철인 플라톤의 주장이다. 철학에 기초한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그가 역사상 최초의 금서 주창자로 기록된 것은 아이러니다. 『오디세이』는 4백여년후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에 의해 독재에 저항하는 자유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다.
『동아대백과사전』은 금서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신앙·사상·정치·풍속등의 여러가지 이유에서 위정자나 종교상의 최고 권력자가 간행·발매·소유를 금지한 서책」.
BC 213년 진나라 시황제가 사상의 통제를 위해 저지른 「분서갱유」,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로 된 벽보가 나붙자 한글 책들을 모조리 불사른 연산군, 16세기 보수적 가톨릭 교회가 만든 유명한 「금서목록」등이 이를 입증한다.
제5공화국의 금서조치는 12·12사건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정권유지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이 걷는 정해진 수순이기도 했다.
80년 7월31일 전두환정권은 1백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시키고 약 보름후엔 6백17개출판사의 등록을 취소시키는 한편 서울지역에서 출판사 신규등록의 길을 막아버렸다.
또한 계엄사에 의한 원고의 사전검열등을 통해 신군부는「이념서적」의 출판을 원천봉쇄했다.
이 때문에 70년대 중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사회과학 도서의 출판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그러나 지속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원전들이 번역돼 나오자 85년5월 정부는 「불온책자에 대한유관기관 실무대책반」을 급조, 행정조치와 사법처리의 쌍칼을 휘두른다.
문화부 통계에 따르면 1980년부터 88년9월까지 판금된 도서의 수는 6백50종.
유신독재 8년간 겨우 45종이 판금됐던 사실과 비교해 볼때 5공의 출판탄압 강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5공시절의 금서란 법률용어도 아니고 당국의 어느 기관도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국이 납본받은 책에 대한 필증을 불법적으로 교부하지 않은채 출판사로부터 「시판중지」각서를 받거나 서점에 「시판중지 협조공문」을 띄우면 즉시 그 책은 금서속에 포함됐다.
『당시 사회과학 책들은 거의 납본필증을 받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시중에 유통되던 사회과학 서적의 80∼90%가 금서였던 셈이죠. 이같은 「시판금지 종용도서」까지 합치면 5공시절의 금서는 1천종이 넘을 겁니다.』
풀빛출판사 대표 나병식씨의 증언이다. 1985년 문공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85년10월말까지 총 10만7천3백30종의 간행물을 납본받아「국헌과 공안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1천4백28종에 대해 납본필증을 교부하지 않았다고 밝혀 나씨의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이같은 사태는 문공부 심의요원의 숫자가 절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직 공무원들로 구성됐기 때문.
『판금도서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책이름에 「민중」「민족」「노동」「변혁」「통일」등의 용어가 들어가면 내용도 검토않고 판매금지 시켰죠.』사계절출판사대표 김영종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80년대 중반에는 판금도서가 됐다 하면 대학가 서점을 중심으로 4천∼5천부는 손쉽게 팔려 금서목록 속에 포함되길 은근히 바랄 정도였습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라는 벅찬 과제를 짐지고 출발한 제6공화국은 앞서의 역기능도 완화시킬 겸 88년 10월19일 이른바 「출판 활성화 조치」를 발표한다.
그 내용은 ▲시판금지 종용도서의 해제 ▲납본필증의 즉시 교부 ▲출판사등록개방 등이다.
이 조치를 통해 그 동안 판금도서로 묶여왔던 6백인종중 4백자종이 해금됐고 1백인종은 사법부의 심사로 넘겨졌으며 겨우 22권만이 금서로 남게됐다.
『가설의 증언이라는 형식에 담은 이책의 내용은 기실 증언에 의한 시대의 심판이다.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 6공의 세번째 총리를 지낸 노재봉씨가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쓴 『전환시대의 논리』의 추천사다.
가설이란 보호망을 쓰고 나온『전환…』가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밝혀진 오늘 한시대 특정권력에 의한 출판탄압이 본질적으로 갖게 마련인 희극성에 다시 한번 주목하지 않을수 없다. <최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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