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으로 치달은 명·암(결산 13대국회: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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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탕주의 만연 민생논의 실종/반짝한 청문회… 「거여」후 국감기능 희석
13대국회는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된 양극단의 정치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청문회와 국정감사는 성역타파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반면 습관처럼 돼버린 극력저지와 날치기 파동은 어두움이었다.
30년만에 부활된 지방자치제는 두드러진 성과였지만 폭로와 한탕주의로 만연된 정치적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민생논의는 실종되다시피 했다는 지적이다.
여소야대시절 자리잡은 정치우위는 민주화질주의 원동력이었지만 정치과잉으로 변질돼 경제논리를 압도해 역기능의 후유증을 남겼다.
13대국회 첫해인 88년 4당시절 일해재단 설립등 5공비리·광주민주화운동·언론통폐합을 추적한 3대 청문회는 5공출범의 비합법성·권력의 궤도이탈·정경유착의 추악한 모습을 실감나게 노출시켰다.
그해 11월3일 5공비리특위가 주도한 「일해청문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한 「권력심부」의 비리를 파헤치면서 5공청산을 국민적 관심사로 증폭시켰다.
텔리비전으로 생중계된 이 청문회는 서울올림픽 시청률을 뛰어넘을 정도로 국민들을 텔리비전 수상기앞에 묶어 청문회정치·텔리비전 정치의 가능성을 보였고 청문회 신드롬(증후군)은 정치·사회·경제전반을 강타했다.
청문회를 통해 5공세력의 「권력관리」의 무모함과 저급성,무소불위한 권력의 타락을 보여줘 권위주의적 통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침으로써 국민적 공분을 일으켜 그해 11월23일 전 전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와 함께 백담사로 은둔하도록 압박한 요인이 됐다.
이때 출석한 증인은 장세동·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정·재계 거물들로 청문회 정국은 기성권위를 허물었다.
광주청문회는 12·12,5·17,김대중사건,「광주」의 과잉진압,지휘체계의 2원화,발포명령,미국의 역할을 쟁점으로 올렸고 정호용(5·17당시 공수특전사령관)·정승화(12·12당시 계엄사령관)씨,김대중 당시 평민총재,신현호 전 국무총리,주영복 전 국방장관 등이 증언대에 섰다.
12·12사태가 하극상,불법군사반란이란 증언이 있었고 신군부의 집권시나리오에 관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줬지만 광주의 비극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언론청문회는 5공 권력장악의 희생물로 언론인 대량해직과 TBC를 포함한 언론통폐합을 통한 언론통제의 추악상을 폭로했다.
허문도·이상재·이진희씨 등은 언론학살에 대한 책임회피로 비난을 면치 못했다.
청문회정국은 6공정권의 정치적 안정을 흔들면서 89년 12월15일 「청와대 대타협」으로 전 전대통령의 12월31일 국회증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정호용 의원은 뒷날 여권내부의 권력갈등과 맞물려 5·18광주사태의 속죄양으로 희생돼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청문회는 노무현·김동주 의원을 스타로 만들었는가 하면 「회장님」「증인님」의 호칭은 의원들의 아첨성과 자질미숙을 드러냈고 정주영 회장의 「시류론」은 두고두고 화제를 낳았다.
30여회의 청문회와 1백50여명의 증인중에는 김철호 구 명성회장이 수감중 수의차림으로 나오기도 했다.
16년만에 부활된 88년 가을 국정감사는 서울올림픽의 감동을 일거에 날려보내고 5공의 각종 비리와 의혹을 들춰내 국회의 국정감사 기능을 과시했다.
전 전대통령의 친·인척이 개입된 비리를 비롯,삼청교육대의 인권탄압,새세대육영회의 과다한 자금조성,공직자 해직,쇠고기 과다수입,정부발주공사 수의계약,부실기업정리 의혹,고문 등이 도마위에 올려졌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국방부도 국감대상에 끼여 「탈성역」을 감수해야만 했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5공비정의 사법적 응징을 위해 검찰의 5공비리 특별수사부 발족으로 이어져 전기환·이창석씨 등 47명이 구속됐다.
89년에도 국정감사는 5공청산의 마무리추적과 방만한 국가예산 집행을 추궁,실적을 올렸으나 감사대상기관의 과다(3백∼5백개),한건주의 폭로와 흥미위주,준비부족,저질시비를 극복해야할 과제로 남겼다.
그러나 90년 3당통합으로 거여소야로 바뀌면서 청문회나 국정조사권 발동은 1건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국정감사는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3대 후반기 국감은 거여의 횡포와 야측의 준비소홀 등이 겹쳐 무기력함만 보여주어 14대국회의 과제로 넘겨졌다.
청문회와 국정감사라는 화려한 국회의 기능이 뒷전으로 물러앉으면서 그나마 내놓을 수 있는 업적으론 지방의회시대를 개막시킨 것.
90년 정기국회에서 지자제관련법을 통과시켜 91년 상반기 기초의회와 광역지방의회 선거를 30년만에 부활시킴으로써 국회의 영역과 역할을 재조정하게 되었다.
90년 거여로 짜여진 국회판도는 대화와 타협대신 물리적 충돌을 회의장 곳곳에 자리잡게 하면서 실력저지와 날치기를 양산해 국민들의 정치불신 심화를 부채질했다.
18일 정기국회 폐막일의 「몸싸움 마감」은 13대국회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구겨놓았으며 이는 13대국회 치욕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당이 「수의 우위」를 바탕으로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야당도 법안의 실질심사 자체를 원천봉쇄,안건의 상정조차 못하게 함으로써 변칙을 유도한 공범이 됐다. 이 때문에 중요법안이 제대로 심사되지 못한 채 변칙통과되거나 폐기되어 버렸다.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 개정안·농수산물 가공육성법안등 농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은 추곡수매안 날치기 파동으로 폐기돼 버렸고 정치관련법안에 의해 민생법안은 관심밖으로 밀렸다. 1백60여개 법안이 정기국회 폐막과 함께 사실상 폐기된 것은 13대 국회가 남긴 또다른 문제점이기도 하다.
13대국회의 영욕은 우리정치의 한계를 나타냄으로써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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