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세원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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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선 말기, 경상도 문경에서 양반집 며느리인 黃부인이 대들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다. 남편은 "상놈에게 겁탈당할 뻔했는데 이후 부끄러움을 못 이겨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검시(檢屍)를 맡은 관리들은 시신에서 여러 타살 흔적을 찾아낸다. 마침내 상놈과 정을 통했다고 여긴 남편이 아내를 때려 죽인 뒤 자살로 위장했음이 밝혀진다.

규장각 등에 남아 있는 검안(檢案.변사사건 보고서)을 보면 조선의 검시제도가 얼마나 잘 짜여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건이 나면 관할 지방관은 반드시 현장에 나가 부검을 지켜본 뒤 1차 검안서를 만든다. 또 인접 지방관에게 2차 검안을 요청한다. 상부에서는 1, 2차 검안서를 대조해 다를 경우 삼검관(三檢官)을 내려 보낸다. 검시조사관이 현장에 나가 1차 조사한 뒤 의혹이 생기면 법의관.검시관이 출동하는 현대 미국의 검시제도와 견줄 만하다.

검시는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라는 지침서에 따라 진행됐다. 책에는 22가지 사망 원인별로 관찰 사안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黃부인 사건의 진상도 책에 나오는 타살 판정법에 의해 밝혀졌다. 자살의 경우 죽기 전에 몸을 비틀기 때문에 매단 끈이 대들보 표면 먼지에 지저분한 흔적을 남기지만 죽은 사람을 매단 경우 가지런한 일자(一字) 모양만 생긴다.

최근 한 법의학 모임에서 "우리의 검시체계가 조선 때만도 못 하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전문가가 사건 발생 단계에서 신속히 개입하지도, 독자적으로 부검 여부를 판단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한명이 2백50건을 처리할 정도로 인력난도 심각하다. 심재륜 전 고검장 같은 분들이 전문검시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지만 억울한 죽음이 생겨날 수 있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4일 사인(死因)확인기관인 세원청(洗寃廳) 설립안을 발표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 지침서인 '세원록(洗寃錄)'에서 따온 이름으로, '억울함을 씻어주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검토해볼 만한 안이다. 아울러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서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씻어줄 '세심청(洗心廳)' 같은 기관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