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0여 년 후배 지시받고 공원부지 철거민 설득 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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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울산시의 인사 혁신 때 업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시정지원단에 발령난 A씨가 15일 울산시 수변공원 조성 부지의 작업장으로 향하고 있다. [울산=송봉근 기자]

"타성에 젖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환골탈태한 모습을 인정받아 반드시 현직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15일 울산시 태화동 수변공원 조성부지. 전국의 공직사회를 뒤흔든 '울산발 인사실험'의 첫 대상자 4명 가운데 1명인 A씨(47.6급)가 51일 만에 자신의 일터에서 털어놓은 심경이다.

울산발 인사실험이란 철밥통이란 비난을 받는 공무원 조직을 깨기 위해 울산시가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5~7급 공무원 13명을 허드렛일을 하는 '시정지원단'에 발령낸 것이다. 업무능력이 개선되지 않으면 퇴출까지 당한다.

A씨는 1월 울산시 인사 때 업무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실.국장들로부터 선택받지 못해 시청의 사업소 계장 자리에서 밀려났다. 1년간 교통량 조사, 쓰레기 수거 등의 힘든 일을 한 뒤 평가결과에 따라 복직을 하느냐, 영원히 공직을 떠나느냐가 결정되는 벼랑 끝에 선 것이다.

A씨는 이곳 13만4000여 평의 들판에 있는 비닐하우스.판잣집 등 3000여 건을 4월 말까지 철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철거지원 작업을 40여 일간 혼자서 해 왔다. 책상에 앉아서 하던 서류작업 등 종전의 일과는 달리 발품을 파는 단순 잡역이다.

그는 울산시청으로 출근하자마자 자신보다 10여 년 후배인 조모(43.7급)씨에게서 그날 할 일을 지시받고 일터로 나간다. 철거 현장에서 그는 점퍼에 운동화 차림으로 논밭두렁을 오르내리며 막무가내로 무.배추씨를 뿌리는 주민을 설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A씨를 감독하는 조씨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철거민을 상대하다 보면 자칫 실랑이가 벌어질 법도 하지만 A씨가 일을 열심히 해 40여 일 동안 한 건의 말썽도 없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A씨와의 일문일답.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13만4000여 평의 부지를 샅샅이 헤짚고 다니느라 매일 10여km를 걸어다닌다. 철거에 협조하는 주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여권 발급 방법 등 업무 외 민원상담까지 해 주다 보니 오후 8시를 넘겨 퇴근하는 적이 많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없었나.

"당당히 공채시험을 통해 들어왔고 25년간 징계 한 번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왜 하필 새 인사제도의 희생양이냐 싶어 며칠 동안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나 때문에 얼굴도 못 들고 다닐 지경이 된 가족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도 하고…."

-심경에 변화가 왔는가.

"두 달 가까이 운동화 밑바닥이 닳도록 철거 현장을 누비면서 느낀 게 많다. 시민들은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해 국민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더라. 나도 열심히 할 거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주변에서 '꼭 복직하라'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많다. 실망하지 않고 힘을 북돋워 준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냥 주저앉을 순 없다."

울산=이기원 기자<keyone@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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