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북소리와 천하태평(유승삼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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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폭격」→「목표물에 대한 서비스」,「폭격기」→「무력꾸러미」,「폭격임무」→「현장방문」,「인간」→「부드러운 목표물」,「건물」→「딱딱한 목표물」,「인명살상」→「위생처리,일소,제거」….
이는 군사암호이거나 우스개 말이 결코 아니다. 미 국방부가 지난 걸프전때 전황을 발표하면서 실제로 썼던 용어들이다. 며칠전 외신은 미국 국방부가 이런 용어구사로 해서 전미영어교사협의회가 주는 「올해의 모호한 표현상」을 수상했음을 전한 바 있다.
○군사대국의 오만함
용어 자체야 웃음을 자아낼만도 하지만 이라크 국민이 아니더라도 결코 뒷맛이 개운한 것만은 아니다. 그 용어 하나하나에는 결코 웃음지을 수만 없게 하는 전쟁의 철저한 비인간성과 군사적 승리에만 도취된 미국의 오만,그리고 그에 반비례한 이라크의 참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이 일을 지나가버린 일로,이라크의 비극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전개되고 있는 미국내의 움직임은 미국의 그러한 오만과 전쟁의 참화가 한반도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분명한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공개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공격이 실행에 옮겨진 날 미 국방부의 첫 발표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우리 무력꾸러미들은 오늘 북한 영변을 현장방문해 목표물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서비스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딱딱한 목표물들은 계획대로 일소되었다. 부드러운 목표들 역시 함께 제거되었다. 어느 정도 위생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성을 가진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이런 참담하도록 모욕적인 발표문을 접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그저 부드러운 목표물로 치고 폭격쯤은 서비스정도로나 표현하는 군사강대국의 저 오만함에 누구나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그러한 사태가 하루가 다르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모두가 천하태평이다. 북한 영변에 대한 공격주장을 그저 이라크에 대한 것인양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아닌가. 심지어 일부이지만 이 기회에 북한을 한번 혼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마저 있는 형편이다.
○단호한 미국 보수파
우리 사회의 이러한 「천하태평」은 좋게 말하면 낙관일 것이다. 그것은 설마 미국이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야 하겠나,공격주장은 북한이 핵사찰을 받도록하는 위협용이 아니겠느냐는 낙관을 전제로 한 것일게다. 국제여론이 두려워서도 미국이 위험성이 큰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쉽게하지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최근 보수강경분위기를 잘 모르고 하는 너무도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미국내 보수파들의 생각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단호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거의 유일한 견제세력이었던 소련이 무력화된 지금 미국으로선 국제적 압력도 큰 고려대상이 아닐 것이다. 지난 걸프전때 미국은 유엔총회가 지난해 12월4일자로 이라크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금지를 결의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바 있다.
분단 반세기의 세월은 우리의 북한지역에 대한 거리감각마저 마비시켜 영변을 먼곳의 어느 고장 이름쯤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도를 펴놓고 보면 서울에서 영변까지의 직선거리는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그것과 같다. 결국 우리는 광주의 핵시설이 폭발할 위험성에 처해 있는데 서울사람이,서울의 핵시설이 폭발할 위험성에 처해 있는데 광주시민이 남의 일인양 팔짱을 끼고 있는 꼴이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영변의 핵시설이 폭파될 경우 그 피해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미국측의 주장대로 북한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거나 핵연료가 저장되어 있다면 영변시설물에 대한 폭격만으로도 원폭투하에 맞먹는 사태를 빚어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 설사 그와 같은 규모의 사태까지는 빚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북한의 보복공격은 곧장 제2의 6·25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천하태평이기만 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명이나 한반도의 참화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슴없이 강경발언을 내뱉고 있는 미국의 강경보수기류에 대해 이제까지 우리 정부측의 공식적인 반응이라고는 지난 15일 이종구 국방장관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견해를 밝힌 것이 고작이다. 뒤늦게나마 이국방이 『전쟁을 막기위해 또다른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일』이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조치는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같은 견해가 기자간담회에서나 표명되고말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외무부가 정부를 대표해 미국 정부와 세계를 향해 공식성명이라도 발표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닌가.
○북한핵 우리의 문제
북한의 핵문제는 미국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문제다. 그런데도 현재처럼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주견없이 미국의 정책에 이끌려 다닐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전쟁의 참화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으로부터의 전쟁북소리도 막아야 하지만 우리 국토,민족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미국 보수파들의 주장에도 강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는 국가와 민족의 자존,그리고 안전과 결부된 우리의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그러고나서 우리는 북한의 핵문제 역시 남북의 손으로 풀 수 있는 길을 못색해야 한다. 북한이 핵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는 길이 결코 없지는 않을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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