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Hot TV] 정선희 "와타시와 딱따구리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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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무슨 프로그램이었을까. 개그우먼 정선희(31)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그는 옆집 친구처럼 친근한 얼굴을 하고는 내 곁에, 아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딱따구리같이 톡톡 튀는 목소리로 같이 수다를 떨어주고(MBC FM '정오의 희망곡'),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남보다 먼저 알려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MBC '찾아라 맛있는 TV'), 귀여운 동물 소식까지 발빠르게 전해준다(SBS 'TV 동물농장'). 그런데 이걸로도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일본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일본어 교재 '정선희의 톡톡 튀는 생활 일본어'(넥서스)를 들고 나왔다.

방송가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정선희의 일본어 실력은 유명하다. 아무리 그래도 초급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의 교재를 살펴보면 순진한 사람이라도 한번쯤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정선희가 썼어?"

아니, 아마도 믿기 어려운 게 아니라 믿기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모나 개인기가 아니라 두뇌가 필요한 작업을 '공부 못한다', 더 심하게 말하면 '머리 나쁘다'고 알려진 연예인이 근사하게 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아직도 많을 테니까. 그러나 먼저 대답을 하자면, 정선희가 직접 쓰고, 그림 그리고(일러스트), 강의 테이프까지 녹음했다.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에 정착한 이모네 집에 놀러는 가 봤지만 길게 머물며 현지 어학연수를 받은 적도 없는 개그맨이 어학 교재를 썼다니. 연예인, 특히 개그맨은 저 눈 아래 놓고 보는 사람들이 어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런 분위기를 정선희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찾아라 맛있는 TV' 녹화장에서 처음 만난 정선희는 "편견이죠. 물론 연예인 스스로 만든 이미지도 있지만"이라고 운을 뗐다. 서운한 기색을 잠시 비치는가 했더니 금세 얼굴을 바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직접 사람들과 부딪쳐서 그런 이미지를 깨면 되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친한 동료 연예인들조차 큰돈 되는 일도 아닌 일에 시간을 쪼개가며 몇달씩이나 매달리는 정선희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니 말이다.

"친한 연예인들조차 '잘 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가벼운 에세이나 쓰지, 웬 교재냐'는 거죠. 누드집처럼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의미있는 작업이니까 매력있어요. 가끔 딱딱한 빵도 먹어야지 맨날 산해진미만 먹을 순 없잖아요."

말이 '딱딱한 빵'이지 정선희에게 일본어는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는 유희거리다. 처음엔 이모부와 의사소통을 위해, 그 다음엔 일본 TV 프로그램을 좀 제대로 보려고 시작한 일어가 이제는 정선희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놀잇감이 됐다. 꼭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재미가 있어 벌써 3년째 일주일에 두번씩 빼놓지 않고 개인강습을 받는다. 이렇게 재미있는 기(氣)를 솔솔 풍기고 다니니 친한 연예인들도 너도나도 일본어에 관심을 갖게 됐단다.

스스로의 미모에 매료된 이른바 '자뻑 클럽'멤버인 엄정화는 "선희씨가 하는 걸 보니 일어가 섹시한 언어인 것 같애. 섹시한 내가 하면 너무 섹시하지 않을까"라며 스스로의 섹시미를 통제하느라 아직 일본어에 발을 담그지 않고 있다. 같은 '자뻑 클럽'의 이소라는 일주일에 한번씩 정선희에게 옷 한벌을 강의료로 주고 일어를 배우고 있지만 한 케이블 프로그램의 일본어 프로그램에서 8개월 동안 일본인 교수와 함께 공동 진행을 맡은 적도 있고, 이번에 본격적인 교재도 냈지만 정작 정선희 본인은 그저 아는 걸 확인하는 단계라고 겸손을 떤다.

"실력이 출중해서 가르치겠다는 게 아니라 같이 공부하자는 거예요. 저도 처음 일본어 배울 때 쓰지도 않는 단어 외우면서 시간 허비했거든요. 이제 와서야 알게 된, 꼭 필요한데 몰랐던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기도 하고요."

정선희는 이 책에 이어 계속해서 일본어 교재를 펴낼 예정이다. 그렇다면 본업인 개그는 아예 그만둔 것일까.

"코미디언은 코미디가 종착역이에요. 아무리 MC로 성공했다 해도 결코 종착역은 아니죠. 그런데 왜 MC만 하냐고요? 코미디 하면서 (신인들과 부대끼며 웃길 수 없다는)한계를 느껴 타협한 거죠. 하지만 꼭 한번 다시 제 기(氣)를, 그리고 끼를 발산할 멋진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찾아갈 거예요."

글=안혜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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