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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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점령된 수도>
여기서 1950년의 6·25 사변 때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남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고, 북쪽에서는 김일성 공산독재정치가 시작된 뒤에 김은 항상 남쪽을 수중에 넣어 공산국으로 통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쪽에 남은 공산잔당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왔다. 제주도에서 대대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국군을 시켜 여수와 순천지구에서 인민공화국을 만드는 큰 반란을 일으켰고, 국회에서는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불똥이 국회에까지 튀어 노골적으로 국가 전복을 꾀하게 되었다.
이어 49년 6월 김구가 암살되고 이듬해 50년 1월에는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태평양 안전보장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빠졌다는 것을 광고했다. 이것을 듣고 좋아한 것은 북한괴뢰여서 마음놓고 남침할 수 있게된 것이었다. 더구나 남한에 남아있는 미군사고문단은 남한은 산이 많아 탱크를 움직일 수 없으므로 탱크가 소용없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북한괴뢰는 스파이망을 통해 남한의 군비상황을 환히 들여다보고, 드디어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대거 남침한 것이다. 25일은 일요일이었고, 군대에서는 전날 밤 큰 파티가 있어 장병들이 모두 술에 취해있었다.
25일 낮 방송은 장병이 빨리 귀대하라고 떠들어댔고 트럭을 탄 국군들이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38선이 당장 무너지고 시시각각으로 괴뢰군이 서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우고 대 부대가 쳐들어오는데 이쪽에서는 기관총으로 대항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28일 새벽에 붉은 테를 단 군복을 입은 어린애 같은 괴뢰군이 서울에 나타났다. 새벽에 돈화문 앞에 나가보니 탱크를 앞세운 괴뢰군 어린 병정들이 이남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열여덟살인 그는 고향이 평북청주이고 중국 팔로군에 소집되어 중국 통일전쟁에 참가했었는데 상해에 있다 49년 10월 우리편의 조국통일전쟁에 참가한다고 평양에 집결하였다.
거기서 다시 훈련을 받은 다음 6월 23일 38선 전선으로 배치되어 25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 기관총으로 대항하는 남한군대는 문제가 안되어 여지없이 무찌르고 무인지경으로 서울까지 도달했다고 하였다.
중국 팔로군은 행진할 때 벌레같이 엎드려 기어서 전진하는데 이것이 퍽 빠르고 총에 맞지 않으니까 희생자가 적다고 하였다. 실제로 벌레같이 기어서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퍽 빨랐다.
괴뢰군의 앞잡이는 이런 중국전쟁에 참가했던 팔로군이었고 이들은 서울만 점령하고 평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3천5백명 가량이 된다고 하였다. 길에는 어느 틈에 붉은 리번을 단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옷에 붉은 헝겊을 달면 무사 통과시켰다.
돈화문 앞 광장에는 국군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붉은 군대는 우리들을 보고 항거만 안 하면 안전하게 생업에 종사해도 좋다고 하였다.
동네에서는 이제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으니 모두들 같이 나누어먹어야 한다고 해서 쌀을 모두 빼앗아갔다.
그 뒤로 쌀 한톨 배급은 안 나오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9월까지 석달 동안을 지냈는데 모두들 굶주리고 공산당한데 잡혀 갈까봐 전전긍긍 살얼음판 같은 생활을 하였다. 석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납치·참살되었고 재산을 빼앗기고 길에 나앉게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지옥 속의 생활이었다. 산 것만 다행으로 알고 9·28 수복을 맞이하였다.
백성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대통령은 수복되어 서울에 들어오는 길로 그동안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을 모두 부역자라고 해서 서울시민의 큰 반발을 샀다. 당시 신성모라는 국방장관은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우리 국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가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때 신의주에 도달한다고 떠들어대더니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도망쳐 서울을 떠났다고 서울시민들이 크게 분개하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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