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아날로그 생활 그 살가운 재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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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저는 수원에서 살고 있는 나이 오십의 주부입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뭐든지 디지털 시대, 다들 편리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만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으며 컴퓨터 또한 컴맹입니다.

모두들 컴퓨터를 하고 새로운 제품들을 구입해 디지털 세상을 누리고 사는데 네 생활이 무슨 그리 자랑거리냐고 친구들은 저에게 뭐라고 합니다. 너도 좀 변한 세상 누리고 살라고. 저 또한 휴대전화 정도는 장만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집에 있는 전화는 어떡합니까. 어딜 가나 요새는 공중전화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방 쓸 수 있어요. 자동차 운전을 못 해도 아직은 건강해 교통카드 한장이면 버스나 전철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컴퓨터를 못해도 세상 소식 가득 담긴 신문을 꼼꼼히 읽고 방송도 듣고 하면 나 혼자 캄캄한 세상에 살지는 않게 됩니다. 편지도 컴퓨터로 치는 것보다 직접 내 손으로 써서 우체통에 넣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직접 만져보고 따져보고 깎아달라고도 하다가 덤으로 물건 파는 할머니들에게서 음식 만드는 방법까지 얻어옵니다. 딱 정해진 가격에 포장돼 있는 물건은 필요한 만큼만 살 수가 있고, 식품도 집에 와서 물만 부어 끓여먹을 수 있어 참 편리하긴 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재래시장의 넉넉함과 정이 빠진 것 같아 시장에서 사다가 만들어 먹고 입고 그렇게 산답니다.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얘들아, 쟤네 집 가봐라. 배추김치.깍두기.총각김치에 때맞춰 장아찌도 다양하게 만들어 놨어. 이부자리도 풀 먹여 이불호청 꿰매서 깔고 잔대"라며 저에게 칭찬 반 놀림 반 얘기합니다. 다들 변한 세상에 맞춰 살고 있는데 나만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떡합니까. 아직까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도 불편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그리 많이 들지 않거든요.

요샌 연세 드신 할아버지.할머니들도 컴퓨터 배우려고 하는데 제가 너무 나태한 것 아니냐면 할말 없고요. 운전은 새가슴이라 못하고 휴대전화는 집전화와 거리의 공중전화가 나의 휴대전화입니다. 다들 공중전화가 필요없나 봐요. 컴퓨터도 배우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우니 어떡합니까. 대신 신문을 글귀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으니 살아가는 데 그리 불편하지 않더라고요.

며칠 전 화서동 재래시장에서 깻잎 삭힌 것 사다가 갖은 양념을 해서 차곡차곡 재워뒀다가 어제.오늘 밥상에 올려놓으니 식구들 밥 한그릇 뚝딱 먹고 더 달라고 합니다. 아들 도시락에 반찬을 싸주었더니 회사 동료들이 맛있다며 "어머니가 만드셨냐"고 묻더랍니다. 저는 아직은 이렇게 삽니다. 사는 공간은 디지털 아파트라는데 안에서의 생활은 아날로그랍니다.

엄순자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화서2동.5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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