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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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멀리 광주산맥이 보였다. 이제 B시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인데 B시는 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기색을 띠고 있다. 이건 내 맘대로 생각한 건데 어떤 도시를 그린다면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E시를 따뜻한 주황빛으로 칠할 것 같다. 아마 E시가 서쪽에 있어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벤치에 앉아 자주 지는 해를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빠와 새엄마가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였다. 반면 B시는 한강의 상류에 있다. B시의 아침 해는 광주산맥을 더욱 검게 색칠하며 하늘의 휘장을 찢듯이 솟아오른다. 그래서일까 B시의 색깔은 여명의 투명하고 푸른빛이다. 한강 하류의 도시에서 한강 상류의 도시로 온 나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투명에 가까운 연푸른빛 B시를 내려다보고 있자니까 아빠가 좋아하는 발자크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생각났다, "파리, 이제 너와 나와의 대결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B시야, 잘 부탁해."

"누나는 그동안 어디 살았어?"

막내 제제가 물었다.

"응, 아빠 집에 그리고 할머니 집에."

제제는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는 듯이 "누나네 아빠는 뭐하는데? 우리 아빠는 교수야"라고 말했다. 둘째 둥빈은 금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글 쓰셔, 엄마랑 똑같이."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후 나는 E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일학년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나는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

"저는 위녕이구요. 우리 아빠와 엄마는 모두 작가세요. 저에게는 동생이 셋 있는데 모두 성이 틀려요."

예상했던 대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교실로 퍼져나갔다. 나는 목소리를 더욱 밝게 내면서 셀카를 찍을 때마다 연습했던 대로 내가 지을 수 있는 제일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둘은 남자고 하나는 여자예요. 여자아이는 나와 성이 같지요. 아빠가 같으니까. 엄마가 같은 동생들은 성이 틀리구요. 하지만 모두가 소중한 제 동생들이에요. 우리 반에 저처럼 동생이 많은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기도 분명 있었다. 내가 누구누구의 딸이고 누구누구는 이혼했고 누구는 언제 다시 결혼했고 하는 소리를 나중에 풍문으로 듣느니 내 입으로 말해버리는 게 편했다. 엄마 또래인 담임선생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엄마가 말했던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야. 나는 분명 그 상황을 즐길 수야 없었지만 누구누구의 딸이라는 숙명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엄마는 정말 엄마에게 주어진 그 모든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들을 즐길 수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날 청소 시간에 담임이 나를 불러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담임은 마치 중병에 걸린 병자를 보는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어쩌면 기형아를 보는 것처럼 두려운 듯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무슨 일이라도 상관없으니… 그런데 말이야. 형제들끼리 사이는 좋니?"

담임선생은 핀셋으로 미세한 물건을 집어 드는 것처럼 조심스레 말했다.

"안 좋아요. 날마다 집 안에서 나는 쟤랑 성이 달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선생님이 원하는 대답이 이거잖아요, 하는 표정으로 담임선생을 바라보았다. 경쾌한 내 목소리에 담임선생은 거의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다른 애들이 부러워요. 날마다 집에서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아아, 나는 저 아이와 성이 같아 그래서 너무 행복해, 생각할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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