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이란핵과 유럽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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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럽으로서는 공동의 이익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을 희생해서라도 위험을 피해야 한다. 유럽국가 중에는 레바논 치안을 담당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독일 해군은 헤즈볼라를 막기 위해 레바논의 해안을 경비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독일은 남부의 탈레반과 싸우는 캐나다 동맹군의 도움 요청에 응하기 시작했다. 또 토네이도 전폭기를 보내 상황을 살피고 있다.

유럽의 3대 국가인 독일.프랑스.영국, 특히 현 유럽연합의 의장국인 독일은 전략적 사안에 대한 공동 대처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악화돼 감에 따라 유럽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될 것이다. 이미 이란과 페르시아만의 상황은 악화 일로에 있다.

이란이 올해 공격을 받는다면 그 파괴력은 그 지역 국가들은 물론 중동의 서쪽에 접한 유럽에도 미칠 것이고 그 여파는 매우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또 이란이 유엔이 부과한 각종 제재를 피해 진짜로 핵 보유국이 될 경우 유럽은 그 대가를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것이다.

압축하면 유럽연합의 최대 안보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즉 이란과의 전쟁을 피하면서도 이란이 핵 보유 국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 이 두 가지 모순적인 조건을 통합된 공동의 전략으로 아우르려면 이란에 대한 효율적 고립화, 유효한 봉쇄, 직접적 협상이라는 세 가닥의 각각 다른 접근 방법을 하나의 시나리오에 담아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그리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유럽은 미국에 유럽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란을 압박할 준비가 돼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첫째는 군사적 행동의 선택은 더 이상 테이블에서 논의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미국을 포함해 관련 당사자들은 이란과 직접적인 협상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란과 직접적인 협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립화를 꾀하는 정책은 '정권 교체'보다는 '동맹 교체'를 겨냥함으로써 시리아를 이란과의 친밀한 동맹관계에서 떼어내려는 공동의 전략으로 추구돼야만 더 많은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유럽연합의 외무장관 회의가 이란에 대한 제재에 동의한 것은 옳고도 중요한 결정이다. 금융 제재의 위협에 직면해 이란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그들이 취하고 있는 대결 정책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점점 더 느끼고 있다. 이란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물리치는 동시에 확고한 태도로 이 제재 과정을 진전시키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란과 관련된 두 가지 최악의 사태, 즉 전쟁과 이란의 핵무장을 방지하는 일은 유럽이 일치단결하고 확고한 태도를 취할 때 비로소 효과를 낼 수 있다. 현재 유럽의 국익과 유럽-미국 간에 현존하는 이익이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지금 행동을 취하는 것은 유럽의 책임이자 특히 유럽연합 의장국인 독일의 의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