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 목욕탕' 학교에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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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초등학교 목욕탕에서 마을 노인과 어린 학생들이 서로 때를 밀어주고 목욕을 하면서 즐거운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금산=김성태 프리랜서 기자]

"손자.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공짜로 목욕할 수 있어 좋습니다."

충남에서 가장 높은 서대산(해발 904m) 자락에 있는 금산군 군북면 상곡초등학교. 6일 오후 이 마을 한용희(76) 할아버지 등 노인 4명이 때수건과 면도기.샴푸 등이 담긴 손가방을 들고 학교를 찾았다.

이들이 곧바로 들른 곳은 교실 건물 옆에 자리 잡은 학교 목욕탕.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7평 남짓한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손자뻘 되는 학생 3~4명이 이미 목욕하고 있었다. 목욕탕 안은 온풍기가 가동돼 실내 온도가 따뜻하게 유지됐고, 벽에는 샤워기 6개가 설치돼 있다.

노인들은 "얘들아 할아버지 등의 때 좀 밀어라"며 때수건을 건넨다. 아이들은 "네 할아버지, 깨끗이 밀어 드릴게요"라며 받아든다.

전교생 17명, 교직원 5명에 불과한 이 학교에서 올해로 3년째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학교 측이 매주 월.화요일 두 차례 주민들에게 개방하는 무료 공동 목욕탕은 웃음꽃이 피는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학교 측은 학교 샤워장 시설을 목욕탕으로 개조해 2005년 3월부터 주민에게 개방했다. 주민들이 대중 목욕탕을 이용하려면 30km나 떨어진 금산읍내까지 가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샤워기만 설치한 보잘것없는 시설이었지만 올 초에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해 편히 쉴 수 있는 즐거운 목욕탕이 됐다.

◆마을 공동체 형성되는 목욕탕=목욕탕의 주 이용객은 학교 주변 마을인 상곡.신안.보광리 일대 150여 가구 300여 명의 주민이다. 월.화요일 하루 평균 20여 명이 이용한다. 일부 주민은 이 학교 학생인 자녀나 손자.손녀와 함께 목욕을 하기도 한다. 물론 교직원도 이용한다. 목욕탕이 비좁아 남탕.여탕 구분은 없다. 대신 오전.오후로 나누어 남녀가 교대로 이용한다.

주제두(72) 할아버지는 "목욕하러 금산읍내까지 가려면 버스로 한 시간이나 가야 해 불편했지만 학교 목욕탕이 생긴 뒤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만족스러워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목욕하러 오는 날 덩달아 목욕하는 학생도 있다. 주진수(10)군은 "할아버지 등을 밀어 드리고 싶어 일부러 기다렸다가 목욕하는 날이 많다"며 활짝 웃었다.

보광리 이강충(50) 이장은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던 주민들이 목욕탕에서 만나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효와 자원봉사 정신도 일깨워 뿌듯"=학교 측은 올해 초 충남교육청으로부터 2600만원을 지원받아 목욕탕 시설을 보수해 재개장했다. 목욕탕 한가운데에 5~6명이 한꺼번에 몸을 담글 수 있는 탕 시설을 만들고 탈의실에 20여 개 옷장도 설치했다. 바닥과 벽 타일도 바꿔 칙칙했던 분위기를 밝게 했다. 낡아서 고장이 잦았던 보일러와 오수 정화처리시설도 새로 교체했다. 보일러 가동 등 목욕탕 운영에 필요한 경비(하루 10여만원)는 학교 예산으로 충당한다.

학교목욕탕 이용이 늘면서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한 자원봉사도 확산됐다. 목욕을 하려는 주민은 마을 이장에게 연락하고, 이장은 학교에 목욕 인원을 통보한다. 그러면 이 학교 교직원 김춘경(53)씨가 학교 승합차를 몰고 마을에 와 주민들을 태우고 학교로 간다. 김씨가 바쁠 때는 마을 이장이 직접 주민들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산위성통신센터 'KT 사랑봉사단'등이 자원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교직원 김춘경씨는 "목욕을 하러 오는 나이 많은 주민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해 조심스럽게 모시다 보면 학생들에게 효도의 중요성과 자원봉사 정신도 가르칠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상구(62) 교장은 "목욕탕 때문에 동네 어르신들이 학교에 자주 오시다 보니 어린 학생들의 인성교육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금산=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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