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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치열하게 사유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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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언젠가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사장을 지낸 오쓰카 노부카즈를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른들도 읽기 어려운 철학서를 아이들이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다카하시 마사노부라는 사람의 독서 프로그램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리고 바로 떠오른 사람이 부산 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선생이었다. 인디고 서원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다. 문을 연 지 불과 3년 남짓 됐지만 그 영향력은 가히 전국적이다. 인디고 서원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허아람이라는 한 사람이 20년 가까이 청소년들과 꾸준히 실천해온 독서 토론이다. 허 선생이 한 권 한 권 다 읽고 매달 추천하는 책들 중에서 3월의 추천도서만 살펴보자. '살아있는 우리 신화''19 그리고 80''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등등. 대부분의 책들이 나온 지 꽤 오래됐다. "처음에는 한 달에 책 네 권을 읽기가 쉽지 않았어요. 훈련이 안 돼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은 '그저 토론'만 하는 게 아니라 '즐겁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이 서가는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되고 있어요." 인디고 서원의 토론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한 학생의 말이다. 모르긴 해도 일본의 서점 주인 역시 아주 오랜 세월 꾸준히 독서 프로그램을 실천한 결과 이제 그 열매를 맺어가는 중이리라.

우리나라의 학교나 몇몇 독서단체에서 이뤄지고 있는 독서 교육은 대학입시라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돼 있다. 책읽기마저도 평가 위주가 되다 보니 독서 결과가 당장 성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급해한다. 분야별로 골라준 선정도서 목록을 기계적으로 읽게 된다. 왜 그 책이 선정됐는지 어째서 중요한 책인지도 모른 채 학교나 독서단체가 읽으라고 골라주는 책을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읽는다. 논술에 맞게 준비된 제한된 책만을, 그것도 간편하게 발췌된 내용만 읽게 되는 건 물론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으면서 사고를 훈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패스트푸드처럼 빨리 먹기 좋게 만든 독서 프로그램이 만연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독서도 문화가 아닌 하나의 교과목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과목, 대학에 입학만 하면 절대로 배우고 싶지 않은 교과목이 돼 버린 것이다. 이처럼 수동적인 독서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결국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책 기피증에 걸리도록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경험은 확장되고 생각은 깊이를 갖는다. 그리하여 독서는 한 사람의 행동의 변화,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갖는다. 결국 책을 읽는 행위는 행동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학입시를 위한 학과목으로 전락해 버린 독서교육이 이러한 독서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학생이 말한 것처럼 '즐겁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리라. 그리고 그 방법은 한 권의 책부터 제대로 읽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좋은 책을 널리 알리는 모임'이나 '인디고 서원'과 같은 곳이 전국 곳곳에 들불처럼 번졌으면 좋겠다.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