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글쓰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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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떤 소설가가 글쓰는 버릇을 술회하는 가운데,자기는 원고지 소비량이 다른사람의 3배나 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가령 2백자원고지 1백장짜리 단편소설을 한편 쓰려면 2백장은 버려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는 일의 괴로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목인데,그러나 비단 그 소설가의 경우뿐만 아니라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글쓰는 일이 정신력뿐만 아니라 체력까지도 크게 소모하는 작업임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의 대중보급은 그런점에서 정신력까지는 몰라도 체력소모는 크게 덜어줄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썼던 내용을 고치는 일,중간중간에 새 내용을 삽입하는 일,똑같은 원고 몇벌을 뽑아내는 일 따위가 손쉽게 처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최근 몇년사이에 급격하게 늘어나는 추세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문예지나 종합지의 편집자들에 따르면 컴퓨터로 씌어진 원고들이 전체원고의 절반을 훨씬 웃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체력소모도 덜어주고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 의한 글쓰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배우기가 까다롭고 귀찮아서」가 주된 이유겠으나 몇몇 사람들의 주목할만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글쓰는 것은 마음인데 기계에 마음을 맡기는 것 같아 싫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인즉 컴퓨터로 글을 쓰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문장이 너무 단조로워지고 건조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혀 상반된 견해도 있다.
『장미의 이름』등 소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최근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지와의 인터뷰에서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간은 글이 생긴이래 처음으로 생각하는 속도로 글을 쓰게 됐다』면서 『따라서 문장구조도 원고지에 쓰는 것보다 더 복잡해지고 온갖 감정기복과 문장기교를 다 표현해준다』고 말했다. 컴퓨터 예찬론이다.
그러고보면 글을 원고지에 육필로 쓰느냐,컴퓨터로 쓰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른 문제일는지도 모른다. 육필원고가 완전히 사리지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정규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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