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 증산시대/20년만에 막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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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득향상으로 소비자들 외면/수매중단후 종자생산은 계속/3공때 보급… 총2억2천여만섬 수확
「기적의 쌀」「녹색혁명의 기수」라는 칭송을 들었던 우리나라 식량자급의 주역인 통일벼가 내년부터 우리농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정부가 25일 올해·추곡수매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내년부터는 통일벼수매를 전면중단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통일벼시대가 20년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통일벼는 일반벼보다 생산량이 15∼30% 많아 보릿고개를 몰아낸 70년대 증산의 주역이었으나 미질이 좋지 않아 최근 소득수준의 향상과 함께 소비자들이 외면,정부가 수매해주지 않으면 판로가 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었다.
쌀이 남아돌자 정부는 최근 2년간 통일벼 감산정책을 써오다 수매중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농림수산부는 그러나 남북통일등 갑자기 쌀증산이 필요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보고 통일벼의 종자보급은 하지않지만 산하기관에서 매년 종자생산을 계속하기로 했다. 또한 통일벼연구는 계속해 생산량이 현재의 두배인 10a당 1천㎏이 되는 품종의 개발을 시도,가공식품용으로 활용해본다는 방침이다.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통일벼가 우리연구진에 의해 개발돼 전국 농가에 보급된 것은 10월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1972년이었다.
통일벼는 양곡수입액이 국제수지 적자의 40%를 차지했던 배고픈 60년대 후반부터 연구가 시작돼 서울대농대 허문회교수가 일본·대만 품종 및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 육성품종인 「IR8」을 삼원교배해 66년 「IR667」을 개발한 것이 발판이 됐다.
이를 토대로 당시 작물시험장의 배성호 연구관등 수도육종연구소팀이 집념의 노력끝에 69년 수원 213호등 우수종자를 개발,증식과 71년의 시범재배를 거쳐 72년부터 농가재배가 시작됐다. 시범재배에서는 10a당 3백30㎏의 생산량을 보이던 다른 벼보다 52%가 많은 5백1㎏의 수확을 기록,국민들을 놀라게 했고 이 해에 「통일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73년에는 통일벼의 운명이 기로에 처했으나 식량증산에 집념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통일벼 못자리에 황색기를 꽂는등 공무원을 통한 통일벼확대 시책을 강행,그해말 10a당 4백81㎏을 수확하는 성과를 거뒀다.
74년부터는 외국쌀도입을 중단하고 통일벼 재배면적을 전체논의 15%로 늘려 사상 처음으로 쌀 3천만섬 생산을 돌파,쌀자급의 기틀을 마련했다.
통일벼 재배면적은 76년 44%,77년 54% 늘어 이해에는 전체 쌀생산량이 우리나라 최고기록인 4천1백70만섬을 달성,무미일이 폐지됐다.
78년 전체 재배면적의 76.2%를 기록한 통일벼는 78∼80년의 냉해피해등으로 재배가 크게 줄어 81년에는 26.5%였다가 올해는 논면적의 4% 재배에 그쳤었다.
통일벼는 20년간 2억2천7백여만섬이 생산됐고 39개 품종이 개발됐으며 그중 대백벼등 20여종의 종자가 중국·베트남·부탄 등에 수출돼 세계식량증산에도 기여했다.<김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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