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교류에 극도의 경계심/박병석기자 방북취재기(평양 77시간: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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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쌀 반입」 묻자 “그런 소문 있던데…”/1백68㎞ 개성­평양 특별열차로 3시간30분
평양은 「우리식」 사회주의 속의 고도였다.
그곳 주민들이 바깥 세계,특히 남한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은 철저히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 비뚤어져 있었다.
24일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을 때 최경원군(중2)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바로 그러한 굴절된 대한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군은 기자가 다가서자 『물어보갔시오』라면서 『남조선에도 이런 훌륭한 궁전이 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기자는 서울에는 어린이회관과 어린이대공원 등이 있어 남쪽의 아이들도 최군처럼 예능생활도 하고 놀이기구도 즐기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최군은 이어 남쪽 어린이들 가운데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최군은 『국민학교는 수업료가 없다』는 기자의 대답이 끝나기가 바쁘게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기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기자선생님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큰소리로 외쳐 깜짝 놀랐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묻자 최군은 『작년에 왔던 남조선기자선생들이 「남조선에는 잘 사는 집 아이들만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며 열을 올렸다.
비단 어린이들 뿐만 아니다.
2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인민문화궁전에서 주최한 만찬때 기자와 같은 식탁에 앉았던 북한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한이라는 이 기자는 같은 식탁에 앉았던 남쪽의 한 기자가 식탁위에 놓여있는 북한담배 대신 서울에서 가져온 담배를 피우자 불쑥 『어제 저녁부터 북조선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구만』이라고 말했다.
남쪽 기자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넘기려 했으나 한기자는 곧이어 『북조선 담배를 남쪽에 가져가서 팔려는 모양이지. 담배맛이 좋아 돈좀 번다며』라고 의기양양하게 쏘아댔다.
결국 그 식탁은 대화와 화합의 장이 아닌 대결과 논쟁의 장이 되고 말았다.
제풀에 지친 한기자가 자리를 뜬후 서울을 다녀왔다는 의사라고 밝힌 같은 식탁의 북측 인사는 『미안하게 됐다』며 대신 사과를 했다.
우리 취재진 50명에게 50명의 북측 안내원이 1대 1로 판문점­평양­판문점의 전 일정을 같이 해주었는데 대학·연구소·조평통 등 각종 국가기관에서 선발됐다는 이들은 북한의 인텔리층이다.
이들중 일부는 금년 5월 평양에서 개최됐던 국제의회연맹(IPU) 총회에 참석했던 남측 국회의원들에게 들은 남쪽사정중 아주 재미있다는 것들을 기자에게 전해주었다.
남조선에서는 자기가 싫으면 직장에 사표를 낼 수도 있고,여자가 술을 따라주는 술집도 있으며,길하나 내는데도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하고,국회의원들이 언론때문에 시달린다는 등이었다.
비록 여행지가 중국·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주 드문 해외여행을 한 사람들로 적지않은 안내원들이 남쪽에서는 전혀 화제가 되지않는 이런 일들을 마치 대단한 얘기나 되는 것처럼 귓속말로 해주면서 재미있어 하고 이상해했다.
「지상의 낙원 북조선의 수도 평양」의 주민들은 세계의 다른 나라로 부터는 물론 북녁땅의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격리돼 그들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다른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갖고 있지 못한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바깥세계는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난 7월 남쪽의 쌀 5천t이 나진항으로 반입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만 만찬장등에서 만난 극히 일부의 당국자들이 조심스레 『글쎄 그런 소문이 있던데』라며 궁금해 했다.
기자는 통제된 북한사회의 매스컴에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은 89년 6월 중국 북경 천안문사태를 보통국민들중 얼마나 전해듣고 있는지를 샘플로 해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20∼30% 정도만이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사회주의에서 보도기관은 선전과 교양의 도구라는 원칙이 하나의 오차도 없이 철저히 지켜지는 곳이 오늘의 평양이다.
평양에 상주하는 사회주의 형제국들인 중국이나 소련특파원조차 취재를 할 때는 외교부 보도과에 한달전에 신청을 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이중 한 특파원은 북한당국은 동구와 소련공산당의 몰락원인을 매스컴 개방에 따른 획일주의 파괴,이산가족 재회 등으로 다른 사회와의 비교에서 오는 불만과 외화벌이를 위한 해외관광객 유입이라고 분석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북한이 교류와 협력에 극도의 경계심을 품는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관료들은 자립적 민족경제가 국제적 고립을 중앙집권적 지령성 계획경제가 생산력향상의 한계에 부닥치고 있음을 깨닫고 있으나 개방이 몰고 올 부르좌 자유화와 오염을 방지할 마땅한 궁리를 마련치 못하고 있다.
서울∼대전간 1백67㎞의 구간을 새마을호 열차가 1시간30분에 주파하는데 비해 남측 대표단을 태운 특별전동열차가 같은 거리(1백68㎞)인 개성∼평양간을 3시간30분이나 달려야하는 현실속에서 교류=개방=흡수통합이라는 등식에 우려를 품고 있는 것도 이해할만 했다.
평양체재 77시간동안 기자실의 송고용 팩시밀리가 내내 말썽을 부리고 그 원인이 평양­개성간 전파선 노후에 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남쪽이 제안하고 있는 라디오·TV의 상호개방은 이런 점에서 북한으로서는 교류의 마지막 과제나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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