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7)제86화 경성야화(62)조용만|매일신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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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군은 점점 일본본토로 다가오고 본토결전이니, 일억옥쇄니 하는 불길한소리가 나돌았다. 한편 무솔리니는 이미 항복했고 독일의 히틀러도 궁지에 몰려있었다.
서울에서는 전쟁소식이 궁금해서 몰래 단파방송을 듣는 사람이 늘어났다.
방송국 조선인 직원이 몰래 단파방송을 듣고 전쟁이 일본에 불리하다는 소문을 냈다고 하여 많은 직원이 잡혀갔다.
신문은 동아·조선 두 신문이 없어진 뒤에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만 남아 황국신민의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 이 신문에는 없어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많은 기자들이 새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일신보는 독점신문이라 부수가 많아 수입이 좋았다.
그러나 이 부수 중에는 만주나 중국에서는 신문 종이가 귀해 신문으로 보는 것보다 근(근)으로 달아 종이로 팔려고 몇 백부씩 가져가는 것도 포함된 것이다.
편집국에는 사람이 퍽 많았는데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람이 해방이 되자 돌연 공산당으로 맹렬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은밀하게 활동해 왔던 것이다.
도중에 아주 얌전하고 말도 잘 안 해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던 어떤 사람은 해방이 되자 돌연 공산당원으로 나타나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해방 후 얼마동안 공산당원행세를 하더니 어떻게 된 셈인지 어느 틈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6·25사변이 일어나던 바로 3,4일전 나는 그를 우연히 광화문 길거리에서 만났다.
『그동안 통 안보였는데 어디 갔었소?』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네, 시골에 가 있었어요』라며 나를 의미 있는 듯한 눈짓으로 바라보더니 『요새 세상이 소란한데 조심하세요』하고 훌쩍 가버렸다.
그리고 3,4일 뒤에 사변이 터졌다. 소문으로는 그가 북쪽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중요 간부가 되였다고 했다. 사변이 나기 전 그 쪽의 선발대로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내친 김에 이 매일신보 이야기를 더 해보자. l934년 중외일보사장이던 이상협이 박석윤의 뒤를 이어 부사장으로 입사한 뒤에 진용을 강화해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김형원을 편집국장으로 취임시키고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던 염상섭을 정치부장에, 유광렬을 지방부장에 임명하였다.
총독부에서는 1938년에 매일신보를 경성일보로부터 분리시켜서 자본금 1백만원의 주식회사를 만들어 독립 경영하도록 하였다.
1백만원 중에서 절반인 50만원은 총독부에서 출자하고, 나머지 50만원은 전 조선에 걸친 조선사람부호들에게 강제로 출자하게 하였다.
매일신보의 이름도 신(신)자 대신 신(신)자로 바꾸고, 최인을 사장에 임명하고 이상협은 그대로 부사장으로 있게 하였다. 돈을 맡은 경리부장에는 경찰출신의 일본사람을 임명하고 상무도 일본사람을 임명하였다.
사장으로 취임한 최린은 3·1독립운동의 실질적인 주동자이었는데 뒤에 시중회를 조직하고 친일운동을 한 사람으로 신문사 운영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매일신보는 부사장 이상협이 중심이 돼 운영해 나가게됐고 이것이 신문사 내의 불화로 번져갔다.
그때 총독부 경무국장은 미쓰하시(삼교효일낭)라는 사람으로 그는 동아일보 동경지국장을 거쳐 만척이사로 있던 김0동진에게서 매일신보 간부간의 내분 이야기를 듣고, 매일신보를 쇄신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새로운 사장에 경찰관 출신으로 김천성이라고 창씨 개명한 이성근을 임명하였다.
그는 보통학교만 겨우 나와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시작해 일본경찰보다 더 충성스럽게 독립군을 잡아들여 그 공로로 충남도지사까지 한 사람이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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