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성 뿌리쳐야 현대시 발전"|한국시인협 「현대시의 과제와 전망」 주제 세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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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인이 산업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돼 고통받을 때 오히려 이 시대의 정신을 이끌 진정한 시가 나온다는 시단의 자각이 일고 있다.
시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시인 4백 여명을 회원으로 지닌 한국시인협회(회장 홍윤숙)는 l9∼20일 대구시 동대구호텔에서 「한국현대시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갖는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시인 이형기·정종규·홍신선·이태수씨 등의 주제발표와 함께 질의·응답이 있게 된다.
미리 제출한 주제발표문을 통해 홍씨는 「문학의 민주화」란 구호에 함축돼 있듯 80년대 기존시단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허물어지면서 시의 담당층이 확산돼 전문시인들 뿐 아니라 아마추어에 가까운 부류나 노동자·농민계층에 이르기까지 시단 인구는 약 3천명으로 늘어났다며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이나 상업주의의 결합으로 일회적 즉물성의 소비 시들만이 범람하고 있는게 현 시단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시를 통한 자아실현, 즉 서정적인 보편성의 시를 축으로 모험적인 운동시로부터 극단의 실험시에 이르기까지를 좌우에 펼쳐 상보적인 작용과 균형을 이룰 때 시단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홍씨는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유신시대와 달라진 것 없는 억압체제의 지속에 따른 절망·반발, 변화된 현실적 삶의 드러냄에 있어서 기존 시적 관습이나 틀의 무용함에 기인돼 시의 틀에서 「압축」의 원리가 무너지고 대신 「펼침」의 원리가 들어서 요설화·눌변화·반복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홍씨는 『기지와 유머감각 등을 주된 기법으로 삼고 있는 이런 외침의 시들이 정신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쾌락의 탐닉으로 흘러 우리의 삶을 원천적으로 왜곡·소외시키는 후기산업사회의 제반현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씨는『비정상적인 문법의 시, 아마추어리즘과 야합된 불순한 시들이 판치고 있는게 문제』라며 『지금 우리 시가 회복해야할 일은 인식과 표현의 시적 엄격성』이라고 주장했다. 정씨는 특히 젊은 시인들 사이에 유행되고 있는 무분별한 시행갈이와 콤마 사용 등 시의 형태를 문제삼았다. 그는 『이런 것들이 의미나 리듬, 그리고 이미지의 연계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시적 사유 체계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고 일부 유행에 물든 형태시들을 꼬집었다. 즉 이러한 형태시들은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라는 상처가 순간순간 몰고 오는 어떤 파기적 심리와 방만성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는 것이 정씨의 지적이다.
이태수씨는『기이한 제스처로 포장된 「가짜 개성」,화제를 겨냥한 「묘기대행진」 「문학의 개그화」등 산업사회의 병리현상이 젊은 세대 시인들 자체에 만연되고 있다』며 『이들을 부추기는 평론가들도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달콤한 물질적 풍요와 인기를 위해 혼과 고통을 팔아버린 시인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형기씨는 『오늘 우리 시단에는 시의 고림과 시의 베스트셀러화라는 상반된 현상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며 이는『독자회복이란 미명아래 서정을 빙자한 달콤하지만 불순한 시로 산업사회나 시대상황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시의 날카로움을 독자들로부터 차단시키고 있는 상업주의의 해악』으로 봤다. 이씨는 『돈과 인기를 약속하면서 시의 세속화를 요구하는 이러한 상업주의의 유혹을 시인들이 결연히 거부할 때만 시는 시로서 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시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시인이 되어 스스로 자초한 그 소외의 고통을 꿋꿋하게 감내해 가는 정신의 금욕이라는 것이 이씨의 지적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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