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6) 경성야화-제86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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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술 마시고 기염을 토하고 울분을 풀어버리는 것이 그 당시 인텔리라는 신문기자들의 생활풍토였다.
1930년대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생태를 돌이켜보면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구한국시대의 유신들이었다.
완고한 봉건주의사상에 젖어있었고 배일사상은 가졌지만 체념하는 사람들이었다.
40대의 사람들은 좀더 현실적이어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렵고 어떻게 자치나 하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자치운동을 은근히 생각하게 되었다. 최린을 중심으로 한 연정회 운동이란 자치를 꿈꾸는 운동이었다. 이와 동시에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교육을 열심히 시켜 인재를 많이 길러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30대의 청년들은 공산혁명을 일으켜 현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독립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줄지어 일어나는 공산당 사건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합법운동을 하자는 신간회(신간회)를 해산시켜 비합법운동에 들어가게 한 것은 이들 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일본이 밉고, 독립은 해야겠지만 어떻게 해야할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의열단원이 조선 안에 들어와 파괴와 살인을 할 때면 마음속으로는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터놓고 의사표시를 하지 못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일본이 망할 징조라고 은근히 생각은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만주국으로 취직하러 떠나기도 하고 장사하러 가기도 하였다. 원래 백성이란 현실적이지만 그 당시의 일반 민중은 일본이 기세가 당당하였으므로 일한 합방을 해서 조선을 먹어버렸듯이 만주를 아주 먹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1927년에 JODK,즉 경성방송국을 개설해 일본말 방송을 주로 하고 조선말 방송은 명색으로 조금 곁들여 해왔었다.
일본이 1932년에 만주국을 세우고 중대한 결심으로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해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게 되자 조선을 소위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하려면 조선민중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조선말로 하는 선전과 홍보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총독부에서는 경성방송국에 조선어방송을 독자적으로 해나갈 제2방송을 설치하였다. 이것을 2중방송이라고 불렀는데 일본말 방송과는 별도로 방송프로를 짜서 독립적으로 방송을 해나가는 것이다.
뉴스와 선전공지사항을 주로 하고 어린이 노래와 만담·방송극·민요를 곁들인 것이 매일의 프로그램이다.
요컨대 직접 조선민중의 귀에다 빨리 뉴스와 선전공지사항을 들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윤백남을 제2방송과장으로 앉히고 과원을 많이 넣어 기구를 크게 확충하였다.
이렇게 해서 1933년 4월 26일부터 조선사람들은 조선말로 하는 방송을 듣게 되어 모두들 기뻐했다.
방송과 동시에 매일신보의 기구도 개혁하게 되어 그해 가을 중외일보 사장이던 이상협을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앞서 매일신보 부사장이었던 박석윤은 사이토 총독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하려다 실패한 뒤에 그리로 보낸 것이고, 박석윤은 얼마 안가 만주국의 폴란드 총영사가 되어 나가버렸다.
그래서 방송국에 제2방송과를 신설하는 같은 뜻으로 매일신보를 확충해 총독부의 조선민중에 대한 충실한 선전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신문전문가인 이상협을 부사장에 임명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로 굳혀갔는데 그해 1933년 9월 총독부는 만주사변 후 최초로 만주 이민단을 뽑아 대량으로 만주 오지로 보냈고, 청진∼신경간의 직통열차를 10월에 개통시켰다.
한편 문화방면으로 이태준·이종명 등 아홉 사람이 모여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극성기여서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예술과 문인들은 숨을 크게 쉬지도 못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문학의 정치성을 거부하고 순수예술작품을 쓰겠다는 동지들이 모여 구락부 형식의 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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