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대사 유엔가입으로 당당해진 「외교첨병」|유엔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유엔결의에 의해 독립되고 정부가 수립된 탓에 초창기에는 거물급,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 유엔대사에 임명됐다. 우리 외교라는 것이 완전히 대미, 대 유엔외교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대 주 유엔대사인 임병직씨를 봐도 분명해진다.
임씨는 해방 전 이승만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도운 직계 인물이다. 이 때문에 임대사는 장택상씨에 이어 2대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나 유엔대표부가 생기자 초대대사로 임명된 것이다.
50년대와 달리 국내에 잇따라 정권교체가 일어나고「아프리카의 해」로 불린 60년부터 신생독립국이 대거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내 판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때부터는 신생국들의 영향으로 한국문제가 매우 복잡해지게 됐다. 이 와중에 부임한 임창영 대사 시절 처음으로 「스티븐슨 방식」으로 유엔외교 전략에 변화가 일어났다. 종전 한국만을 단독 초청하던 방식을 남북한 동시초청으로 하되 북한이 유엔의 권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한국만을 초청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표 획득을 위해 정면대결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유엔대결외교는 이수영(61.7∼64.5)김용식(64.5∼70.12)대사시절에도 계속됐다.
김대사는 이미 10대 외무장관을 1차 역임하고 유엔대사로 부임해 유엔대사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줬다.
김대사가 재임하던 68년 20년 이상 아무런 결실도 없는 유엔대결에 변화가 시도됐다. 유엔내 세력분포에 큰 변화가 일어나 득표활동에 상당한 외교력과 자금이 소모될 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토의만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방들 사이에도 한국문제의 유엔상정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한국은 유엔에 한국문제를 자동적으로 상정시키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보고서를 사무총장에게 직접 제출할 수 있도록 변경했으나 이번에는 북한측이 외군 철수안을 유엔에 상정, 한국문제는 상당기간 유엔을 무대로 동서대결의 소재가 됐다.
김용식 대사가 대통령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전임한 뒤 5대 유엔대사로 부임한 사람이 한표욱 대사다.
한대사가 재직한 시기는 김신조 등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대만축출 및 중국 가입, 중동전쟁과 오일쇼크 등으로 동서대결이 극치를 이룬 때였다. 특히 비동맹회원국이 50∼60년대의 28%선에서 40%선을 넘어서고 있어 득표활동에 애로가 심각해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71년에는 운영위원회에서 연기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73년 6·23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 이후에는 남북한의 동시초청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정책전환을 하게된다. 특히 그해 5월에는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를 계기로 7월 뉴욕에 유엔대표부를 설치, 바야흐로 남북의 정면대결이 시작된다. 이해 5월 유엔대사로 부임한 것이 WHO를 담당하는 주 제네바대사였던 박동진씨다.
박대사가 부임한 때는 유엔내 판도가 상당히 기울어 표 대결을 피하려는 동서막후교섭이 진행됐고, 73년말에는 북한측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UNCURK를 해체해버렸다.
북한은 이러한 분위기를 업고 74년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는 등 평화공세를 적극적으로 펴 한국측안이 가결된 상태에서 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를 골자로 한 결의안을 제출, 가부동수를 얻어냈다. 75년에는 베트남 공산화의여세를 몰아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이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유엔총회에서는 남북한 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희극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박대사 후임으로 최근 지병으로 사망한 문덕주 대사가 부임한 76년에도 북한측은 한국문제는 남북대화로 해결하자는 우리측의 제의를 무시하고 핵무기철수, 유엔사 해체, 외군철수, 대미평화협정 체결 등 강경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에 한국측도 결의안을 제출하자 총회 개막직전 북한측이 이를 철회, 처음으로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막상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지 않게 되자 유엔대표부의 역할이 급격히 축소돼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게 됐다.
문대사 후임으로 79년4월 부임한 윤석헌 대사도 이점이 고민이었다. 윤대사는 매주 월요일마다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고 매주 대사관 직원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 토론 결과로『한국의 유엔가입문제』 라는 영문책자를 발간, 관련국들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5공화국의 첫 번째 청와대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있던 김경원 대사.
김대사는 미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75년 39세의 나이에 대통령 국제정치담당특보로 처음 관계에 발을 들여놨었다.
김대사는 83년9월1일 소련전투기에 의해 대한항공007기가 격추되자 미국·일본·캐나다와 함께 안보리소집을 요구, 다섯 차례에 걸친 연설을 하며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다. 김대사가 능변으로 회의분위기를 잡아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해 결의안 채택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최광수 대사를 거쳐 부임한 박근 대사는 올림픽이후에는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는 신념을 직원들에게 강조하며 대책안 마련을 지시, 87년에는 당시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사신으로 이 안을 보고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임인 박쌍룡 대사 시절인 88년 우리 정부는 올림픽 이후의 우리 위상을 보이고자 유엔총회 연설을 추진했다. 처음에는 북한과 그 지지그룹에서 반대했으나 우리측이 강력히 밀고 나가자 오히려 중국측이 남북한 공동참여 하에 한반도의 평화방안을 주제로 연설하도록 하는 절충안을 내놓아 노대통령의 연설을 성사시켰다 .외무부의 한 관리는 『우리가 밀어붙이자 공산국가도 중재안을 낸다는 데서 자신감을 얻었고, 유엔가입을 밀어붙이는 용기를 갖게됐다』고 말했다.
유엔가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박대사의 후임으로 현홍주 현 주미대사가 유엔대사로 부임하면서부터.
현대사는 지난해 연초부터 대통령의 지시로 유엔가입을 공언했으나 국내여론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중국도 한번만 연기해줄 것을 요청, 준비만 하고 노창희 대사에게 바통을 넘겼다.<김종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