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남미 갈아엎는 '미국산 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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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궁정 전투의 국제화

이브 드잘레이, 브라이언트 가스 지음, 김성현 옮김

그린비, 528쪽, 2만원

유권자의 표나 총칼로 권력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것으로 통치할 순 없다. 국가경영에는 경제와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를 갖춘 전문가들은 권력자에게 발탁되려고 서로 경쟁한다. 권력자의 '귀'를 잡으면 국가정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이런 귀잡기 경쟁을 '궁정 전투(palace wars)'라고 부른다. 사극 드라마가 떠오르는 낱말이지만, 이 책이 그리는 내용은'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이다. 전세계를 배경으로 현란한 전략과 숨은 음모가 도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각국의 궁정 전투에서 승리한 엘리트층이 내놓는 정책들은 한결같이 미국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개발처나 포드재단 등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경제학.법학.가치를 배운 각국 엘리트들이 귀국한 뒤 알게 모르게 자기 나라를 미국식으로 개편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궁정전투의 국제화'란 미국 지식이 세계 각국의 국가경영에 적용되는 현상을 말한다.

남미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이 대표적 사례로 인용한 게 칠레다. 규제 완화와 개방을 강조하는 시카고대 경제학과에 유학한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들은 귀국 뒤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발탁된다. 이들은 미국에서 배운 대로 국가개입의 축소와 민영화, 해외투자 개방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이들이 개발한 국가 아젠다는 국가경영 지식이 필요했던 군사정권과 지식분야 세력확대를 원했던 미국의 환영을 동시에 받았다.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미국에서 경제학 지식과 인맥을 쌓은 유학파 경제학자들이 국내에선 탈규제와 민영화, 해외투자 개방 바람을 일으키고 해외에선 미국을 등에 업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얻어왔다. 그 결과 그들은 요직을 차지했으며, 미국식 경제정책으로 재편된 브라질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했다.

이에 비해 법률 지식 쪽은 언뜻 상황이 달라보인다. 남미의 일부 법률가들은 군사정권에서 반체제적인 인권.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칠레에선 경제학자들은 자유경제 등을 앞세워 군사정권을 옹호했지만, 법률가들은 인권문제를 들어 군사정권을 공격했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자유경제와 인권 모두가 어차피 미국식 지식과 가치.정책에서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남미에서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변호사들은 인권운동에서 손을 떼고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르헨티나의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지만 정치인으로 변신해 권위를 내세우고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게 인권운동이란 법률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궁정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최고권력을 손에 넣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지은이 이브 드잘레니는 프랑스 사회학자이며, 브라이언트 가스는 미국 법률가이다. 국제통화기금.포드재단.국제사면위원회 관련자와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400여 명과의 인터뷰를 거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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