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얼음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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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1Ds MarkⅡ 100mm f8 1/60 ISO 200

남도의 들녘은 어느새 봄입니다. 파릇하게 오른 냉이는 제법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고, 아지랑이 살포시 오르는 대지엔 손톱보다 작은 들꽃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때 이르게 물오른 매화나무의 겨울눈은 껍질을 열고 겨우내 품었던 꽃을 화사하게 피웠습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는 봄이지만 그냥 온 것만은 아닙니다. 이른 새벽이면 숲의 겨울나무는 얼음 옷을 입습니다. 잎 하나 없는 나뭇가지마다 제 몸조차 못 가눌 두툼한 얼음이 달립니다. 대기 중에 스며 있는 수분이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생겨난 것인데, 이를 빙화(氷花)라 합니다. 이 얼음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자랍니다. 고드름 쑥쑥 자라듯 밤새 자라 얼음꽃이 되는 거죠.

굽고 휘며 뻗어간 그 모양새가 마치 고고한 사슴의 뿔 같습니다. 때깔 고운 햇살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퍼져 들면 숲은 마치 보석처럼 아롱거립니다. 건듯 바람이 스치면 여기서 반짝, 저기서 번쩍 현란하여 어지럼증이 납니다. 기온이 제법 오른 한낮이면 얼음꽃들은 다시 얼음 비가 돼 후드득 쏟아집니다. 그러다 또 기온이 내려가면 나무들은 새로운 얼음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사람의 눈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나무는 처절한 고통일 겁니다. 나무의 앳된 겨울눈도 화석처럼 얼음에 갇혔습니다. 그 낱알만 하고 앙증맞은 겨울눈이 싹과 꽃을 품은 채 얼음 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모습은 처연합니다. 무엇이건 새 생명을 잉태하자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겨울눈만 한 게 있을까요. 머지않아 앞 다투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겨울눈은 차디찬 얼음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하며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 쌓인 숲에서 투명한 얼음을 촬영하면 그 질감이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얀 배경이 얼음에 투과돼 희멀겋게 보입니다. 어두운 색감의 모자나 외투를 바닥에 놓고 배경이 되게 해보세요. 마술처럼 질감이 살아납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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