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재용기자의행복연금술] 와인과 펀드 어쩐지 닮은 구석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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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와인 열풍이 거세다. 지난해 국내 매출도 3000억원을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와인 이름 몇개라도 외워두지 않으면 웬만한 모임에서 '와인맹(盲)'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붐이 몰아친데엔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神の滴)'의 공이 적지 않다. 와인 얘기를 다룬 이 만화는 국내에 소개된 지 1년 만에 55만권 이상 팔렸다.

그런데 요즘의 와인 열풍을 들여다보면 조금 앞서 몰아친 펀드 투자 붐과 신기하게도 여러모로 닮은 꼴이다. 무엇보다 어느날 갑자기 인기가 폭발한 와인과 펀드의 '정체성'이 비슷하다. 우선 둘 다 상품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세계 50여개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경우 전문가들조차 상품 가짓수가 몇 종이나 되는지 모른다. 포도원마다 각기 다른 이름의 와인을 내놓기 때문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만 포도원이 8000여곳이다. 펀드도 마찬가지다. 국내에 출시된 펀드만 줄잡아 1만여개다.

암호처럼 복잡하고 긴 이름을 갖고 있는 것도, 그 이름에 나름의 규칙이 숨어 있는 것도 같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포도주 중엔 이처럼 긴 이름도 있다.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즈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 밸리'. 복잡하긴 프랑스 와인도 이 못지않다. '르 프티 무통 드 무통 로쉴드', '조르주 뒤 퀴베 샤토 퓨이게로'…. 펀드도 이에 질쏘냐. '미래에셋차이나디스커버리법인주식 1종류A', 'KB차이나포커스주식형재간접CLASS-A'….

작황이 특별히 좋은 때의 빈티지(와인)나 주가가 치솟은 해(펀드)에 출시된 게 아니라면 '오래 묵힌 것'일수록 대체로 가치가 큰 것도 엇비슷하다.

심지어 둘 다 버려야 할 것마저도 같다. '묻지마식' 따라하기다. 실제로 우리나라 와인바에선 적지 않은 고객들이 '신의 물방울'에 소개된 와인들만 찾는다고 한다. '내 입맛에 맞는 와인인지, 가격은 적당한지' 등 정작 중요한 것들은 뒷전이다. 그런 면에선 펀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수익률이 좋다고 소문나면 내 투자 스타일에 맞는지, 변동성은 큰 지 작은지 별 상관이 없다. 투자 정보가 훨씬 부족한 해외펀드는 정도가 더욱 심하다. 하지만 '나몰라식 따라하기'의 후유증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크다. 내게 맞지 않은 와인을 골랐을 때엔 경솔함을 탓하며 잠시 후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잘못된 펀드 투자는 목돈을 날리거나, 생애 설계를 수정해야 할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각설하고. 얼마전 저녁 자리에서 만난 취재원이 귀가 쫑끗한 얘기를 해줬다. "자녀가 태어난 해의 와인을 사두었다가 훗날 대학 입학이나 결혼식 등 뭔가 기념이 될만한 날에 주면 잊지 못할 선물이 될 거야."

와인 대신 아이 이름으로 펀드를 들어 나중에 건네주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표재용 기자

◆표재용 기자의 '행복 연금술'은 매주 화요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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