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안좌 등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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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걸어서 물 위로 오 리쯤 가는 길에 그가 있다

고집 센 사랑니처럼

별 쓸모도 없는

안도나 휴식이나 평화나 위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주전자에 물 끓여놓고

그와 마주 보는 창가에 차까지 한 통 내려놓고

앉지 말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는 빚이 없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체하는 배들을 위해

밤마다 불을 켜고

나팔을 부우우 불어 다 갚았다


돈을 빌리고 잊어 먹는다. 사랑을 받고 까먹는다. 모르고 그렇게 되고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빚진 것투성이라고 등대가 깜박거려 준다. 저승에 갔다가도 빚 갚으러 다시 오라는 듯 휴대용 스피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말해 준다. 아무려나, 호박꽃 같은 인생아. 빚 없는 자 누구냐. 그럴수록 열심히 파도를 헤쳐 나아가야지.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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