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물 위로 오 리쯤 가는 길에 그가 있다
고집 센 사랑니처럼
별 쓸모도 없는
안도나 휴식이나 평화나 위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주전자에 물 끓여놓고
그와 마주 보는 창가에 차까지 한 통 내려놓고
앉지 말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는 빚이 없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체하는 배들을 위해
밤마다 불을 켜고
나팔을 부우우 불어 다 갚았다
돈을 빌리고 잊어 먹는다. 사랑을 받고 까먹는다. 모르고 그렇게 되고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빚진 것투성이라고 등대가 깜박거려 준다. 저승에 갔다가도 빚 갚으러 다시 오라는 듯 휴대용 스피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말해 준다. 아무려나, 호박꽃 같은 인생아. 빚 없는 자 누구냐. 그럴수록 열심히 파도를 헤쳐 나아가야지.
<김선우.시인>김선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