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등장으로 쇠퇴기 맞아/소 공산당 영욕의 9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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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억압과 부패… 민중불만 쌓여/이데올로기 대립 종언 고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총본산이었던 소련공산당의 24일 해체선언은 19세기 이래 사회주의사상 전체가 역사적 역할을 끝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사건이다.
소련공산당의 상실은 중국·북한·쿠바·베트남 등 후발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서방 사회주의 세력쇠퇴도 불가피하게 할 전망이다.
이로써 20세기를 특정지워온 이데올로기 대립은 완전히 종언을 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74년,전신인 러시아사회노동당창설(1898년)로부터 헤아리면 93년 역사를 갖는 소련공산당은 지난해 2월 1당독재 포기선언으로 이미 그 종막을 예고했다.
소련공산당은 「국가속의 국가」로 세계육지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소련을 지배하는 유일 정당이었다.
그러나 소련을 체험한 식자층은 누구나 동의하듯 공산당은 「거대한 특권집단」(노멘클라투라)이었다. 이때문에 「3일 쿠데타」기간중 러시아인들이 보여준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타도대상이었다.
이번 공산당 해체선언으로 60만∼70만명의 당간부는 그 특권을 잃고 사실상 공산당기구에 의한 관리·운영이 마비됐다.
소련공산당 74년 역사는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점철된 미완의 「시험기」로 20세기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으로 발족,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의 당내 대립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을 지도자로 하는 볼셰비키당이 주도권을 잡았다. 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정식명칭을 현재의 소련공산당으로 개칭했다.
77년 소위 브레즈네프 헌법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이 규정되었고 소련유일의 정당으로 내외정책의 결정권을 쥠으로써 절정기를 맞았다.
분파를 허용하지 않는 민주집중제 원칙 아래 일사불란한 단결을 과시했고 당서기장은 국가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소련공산당은 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맞으면서 사실상 쇠퇴기에 들어간다. 객관적으로 보면 고르바초프시대 6년간은 사실상 러시아혁명을 종결짓는 혁명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최고지도자가 된 85년 3월 당시 소련은 브레즈네프 시대로부터의 억압과 부패가 국민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석유수출에만 의지한 방만한 경제운영은 산유량감소·유가저하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르바초프가 내놓은 정책이 바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공개)다.
하지만 소련경제의 결함은 단순히 기술적 쇠퇴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사유재산 부정으로 공장·토지·상품 어느것도 무책임한 상태로 방치된 것이 문제였다.
강압적 중앙통제경제가 생산성 저하를 가져왔으며,사회주의 경제체제 그 자체가 저미의 원인이었다.
때문에 기업에 다소 독립성을 주는 부분적 개혁만으로 위기는 극복될 수 없었으며,공산당독재의 포기를 선언하지만 이는 지휘체계의 붕괴에 따른 혼란을 가져왔으며 결국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불가피하게 했다.
소련공산당의 지배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통성의 유일한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당의 무류성의 신화와 연결,이단자에 대한 억압을 낳았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는 결국 공산당지배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데 공헌했다.
글라스노스트로 한번 고삐가 풀린 소련국민의 정치의식은 이에 그치지않고 결국 공산주의독재 포기와 복수정당제,그리고 공산당의 해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번 보수파 쿠데타는 이처럼 이미 쇠퇴기를 맞은 소련공산당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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