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기행-상 이경철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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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경에서 열린 한국문인협회 주관 해외문학심포지엄을 마치고 돈황까지 간 문인은 38명. 88올림픽이후 중국왕래가 가능해지면서 이곳을 찾은 한국인은 30명도 안된다하니 일시에 38명의 문인이 몰려든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병화·한승원·조성기·윤후명 ·윤흥길씨 등 대표적 문인들이 북경에서 4천5백㎞나 떨어진 인구 11만명의 변방도시에 불과한 이곳을 찾은 것은 물론 그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위해서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도시에서 삶과 죽음, 원시와 문명, 그 접점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감숙생 생도 난주에서 비행기로 2시간 날아온 일행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사막, 그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나섰다. 실크로드란 명칭은 중국비단이 서양으로 수출되던 길에서 연유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실크로드의 관문 돈황에 와보면 보드라운 모래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 산들이 그대로 굽이굽이 펼쳐놓은 비단폭과도 같다.
『그대 지금 서행하면 언제 돌아오려나? /저토록 험한 길 행여 쓰러질까 두려워// 저 슬픈 새들이 고목에서 우짖는다. /수컷은 날고 암컷은 뒤따르며 숲속을 퍼득인다. /소쩍새 달빛보고 피를 삼키며, /빈 산을 울린다. /촉나라 가는 길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운가? /사람들이 말만 듣고도 하얗게 질린다. /연연히 높은 봉우리, 하늘과 겨우 몇 뼘 사이 /마른 소나무 거꾸로 뻗어 절벽에 걸렸다.』
당대 시선 이백은 시 「촉도난」을 통해 서역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이와 같이 읊었다. 당대 수도 장안(지금은 서안)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는 난주를 거쳐 돈황에서 서성북도·서역남도로 나뉘어 파미르고원을 넘어 로마에까지 이어진다
한의 무제가 기원전111년 황하의 서쪽 변방 흉노족을 토벌하고 하서서군을 설치, 서성경영을 본격화하면서부터 돈황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사막과 산을 넘는 길의 험난함 때문일까. 이백의 시구처럼 「저토록 험한 길 행여 쓰려질까 두려워」 돈황에는 여행자의 안전을 비는 유적과 풍속이 널려있다. 시내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높이l27m, 황토색 벽돌로 된 9층탑이 하나 솟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도 고승 구마라습이 인도에서 장안으로 가던 길에 타고 오던 백마가 이곳에서 죽어 애마를 기리기 위해 탑을 지어 백마탑으로 불린다. 이후 이 탑에서 실크로드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말이나 낙타를 멈추고 여행의 안전을 빌었다.
그러나 이·저승을 넘나들 정도의 험로 실크로드를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것은 돈황의 두 관문인 옥문관과 양관. 황량한 사막 한오라기 명주실 같은 길 위에 돌연히 나타난 여성 성기모양의 옥문관과 남성의 그것인 양관은 무엇일까. 서역 망망한 모래바다를 헤쳐온 여행이, 신기루 같은 삶이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상징이 아닐까.
황량한 사막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도시 돈황에는 이밖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태어난 풍속들이 많다.
그러나 돈황은 결코 원시주술적 도시가 아니다. 시내에서 25㎞쯤 달리다 보면 삼위산과 명사산이 마주치는 지점에 막고굴이 나타난다. 1천여개의 굴을 뚫어 그 안을 불상과 조각·벽화 등으로 꾸민 이 거대한 동굴문화는 366년부터 1천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전진의 수행승 악승이 구도를 위해 서역으로 가다 명사산에 이르러 삼위봉을 바라보았더니 홀연 황금빛 천불이 보여 여기에서 첫번째 굴을 파고 구도한 이래 14세기초까지 1천여년동안 1천여개의 굴이 뚫렸다는 것이다.
해가 떠오르거나 질때 돈황의 명사산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모래능선들을 바라보노라면 황금빛 천불상이 드러날 것도 같다. 돈황의 여름철 일몰은 오후 10시반쯤 돼야 볼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천불로 보기 위해, 혹은 극락으로 이어지는 황금비단길로 보기 위해돈황 청춘남녀들은 월우천이라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있는 막고굴 반대편 기슭으로부터 명사산을 오른다.
그 시각 시내 중심가에는 우리의 포장마차 같은 노천카페가 늘어서고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를 피한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차와 술을 즐긴다. 또 4인조밴드가 이끄는 노천무도회장도 개설돼 부부끼리, 연인끼리 블루스 등의 춤도 즐긴다.
막고굴 곳곳에서 발견되던 비파를 켜며 하늘로 오르던 비천녀, 그 비천녀가 지금도 시내 중심대로 한가운데 거대한 조각으로 남은 돈황은 영원을 향한 삶의 변방이다.
동서문화가 최초로 만나 이룬 도시 돈황, 10년에 한번 비가 온다고 여겨질 정도의 척박한 자연속에서 숱한 민족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그 속에 싹튼 사랑은 현대 도시문명에 시든 문인들에 있어 상상력의 원천이 됐다. 언어의 상징성과 이미지에 갇힌 삶의 원초성을 찾기 위해 무의미의 허무에까지 갔던 시인 김춘수씨가 이곳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긴장을 찾았으며 『돈황의 사랑』 『누란의 사랑』이란 소설을 썼던 윤후명씨도 이곳을 문학적 상상력의 고향으로 삼고 있다. 사랑해도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대인들의 절망적 사랑을 그리면서도 작중화자를 통해 『소라 고동이 천년이 지나면 파랑새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영원성을 꿈꾸던 윤씨는 이곳에와 막무가내로 술만 마셔댔다. 그의 상상력이 그려낸 순간과 영원이 혼돈된 도시, 돈황을 확인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윤씨는 해떨어진 도시의 노천무도회장엔 나가 30∼40쌍이 어울려 추는 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블루스를 격정적으로 추면서 서로를 너무 갈망하는 눈빛이면서도 한번도 가슴을 맞대지 않은 그들의 춤. 너무 떨어지면 체온을 느낄 수 없고 너무 다가서면 서로의 가시 같은 털에 찔릴 수밖에 없는 고슴도치딜레마. 그 거리를 유지하며 춤을 추면서 돈황의 여자들은 모두 선녀가 돼 하늘로 올라가는 듯 하다. 굴이며 거리에 가득찬 비천녀의 도시 돈황, 돈황은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자연과 문화, 그리고 동과 서의 가장 적당한 거리가 이뤄낸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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