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스미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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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제군, 만나게 돼서 반갑네. 왜, '미스터 앤더슨'이 아니라 섭섭하신가? 흠, 그러나 영화 속에서 당신들이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사람이 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걸.

우선 나의 정체가 요령부득인 무지한 인간들을 위해서 짧은 강의를 해주지. 나 스미스는 매트릭스의 설계자 인공지능 시스템이 통제하지 못하는 1%의 오류를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탄생했지. 바로 미스터 앤더슨 같은 버그 말이야. 하지만 1편에서 난 실패하고 네오의 손에 죽고 말지. 여기서 끝났다면 난 그저 악당의 앞잡이로 끝날 운명이었어. 그런데 인간들이 누군가. 좋아지면 물리도록 우려먹은 뒤 넌덜머리를 내면서 욕을 하는 한심한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난 2편에서 부활했어. 그런데 네오가 나를 죽이면서 고맙게도 시스템과 나와의 연결을 끊어버렸어. 난 더 이상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 앞잡이가 아닌 거야. 자신이 '그 사람(the one)'임을 깨달았던 미스터 앤더슨처럼 난 그의 자유 의지를 복제했지. 매트릭스를 벗어나 인간들의 현실세계, 나아가 기계 세계까지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거야. 인간들을 내 모습으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까지. 인간들이 그토록 '자유'니 뭐니 하면서 완벽한 통제의 세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 하던 이유를 알 수 있겠더구먼.

네오가 하늘을 날고 총알을 손으로 막으면서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졌지. 결국 기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려던 미스터 앤더슨은 진짜 적이 누구인지 뒤늦게 깨닫더군. 시온이네, 센티넬이네 하면서 싸워 봐야 결국은 이 전지전능한 스미스에게 갖다 바칠 선물이란 걸 말이야.

아, 하지만 그건 협잡이었어, 이런 비겁한 네오, 비겁한 기계 같으니라고. 둘이서 협상을 하고 나를 영원히 제거해 버리다니.

그래, 야비한 인간들의 술책을 진작 알아야 했어. 어차피 인간들은 악역이 주인공과 대등하게 강해지길 원하지만 난 살 수 없고 나의 강함은 내가 죽을 때 인간들이 느끼는 쾌감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 말이야.

결국 우리는 영화의 재미와 필연성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이용되지만 권선징악 같은 코드 때문에 개 같은 죽음을 당할 뿐이지. 매트릭스의 인간들과 비슷한 꼴이 됐군. 나같은 악역이 사는 방법이란 이 스크린이라는 매트릭스를 뚫고 리얼 월드로 가는 수밖에 없어. 왜냐고? 현실 세계에서는 언제나 악이 이기니까 말야.

흠, 잠시 흥분했군. 다시 영화 속으로 와서 제군들, 네오가 나를 껴안고 장렬히 전사해서 기계와 앞으로 행복한 공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글쎄, 설계자는 "내가 인간인 줄 아나?"라면서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걸 시사했지만 결국 인간들은 다시 기계에게 배신당하고 말걸. 검은 하늘은 다시 태양을 덮어버리고 설계자는 다시 인간을 통제하는 선택을 하고 말거야. 인간들이란 그런 존재거든. 그때 누가 당신에게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눈 앞에 들이민다고 생각해봐. 당신들은 안락한 생활이라는 꿈을 꾸면서 파란 알약을 고르고 말거야. 암, 그렇고 말고.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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