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 최남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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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육당 최남선이 1920년 9월에 열린 공소공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복역 중 뜻밖에도 만기출소 7개월 전인 1921년 10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당시 육당에 대한 인기는 대단해 동아일보에서는 출옥하는 광경을 그린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했고, 출옥하자마자 각 사회단체 연합으로 천도교당에서 출옥환영회를 열었다.
1922년 9월에 육당은 동명사를 창립하고 주간잡지 『동명』을 창간했다.
잡지 『동명』은 타블로이드판 18면으로 된 종합 시사잡지인데 최남선의 인기가 굉장했던 만큼 이 잡지의 인기도 대단해 나온 지 2∼3일만에 2만부가 매진돼버렸다. 그때 우리나라의 젊은 인텔리치고 『동명』을 사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고등보통학교에 갓 입학한 나도 종형의 권유로 이 잡지를 사 열심히 읽었다. 권두 논문인 「조선민하론」을 뜻도 잘 모르면서 몇 번이고 거의 욀 만치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로 말하면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3년밖에 안된 시점이어서 만세소리가 이따금씩 끊이지 않았고 무장 독립군이 만주와 국내 각지에 출몰해 민중의 흥분이 식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때 최남선은 「민하론」에서 「우리가 갈구하는 그것이 머지않아 눈앞에 실현될 것이니 이를 위해 우리는 스스로 각성해 우리민족이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주간지 『동명』은 큰 인기를 끌어 신문 이상으로 많은 부수를 발행했다.
제3호부터는 또 육당이 집필하는「조선역사 통속강화」가 연재돼 학생들은 이것을 교과서처럼 애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흠이 있다면 잡지의 내용이 딱딱하고 어려워 독자들이 쉽게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 검열 당국이 그들의 눈에 조금만 거슬리는 기사가 실려있으면 용서없이 압수하고 발매를 금지시키는 통에 『동명』잡지는 독자의 손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번 압수처분 당하면 인쇄했던 책을 몽땅 경찰서에 납부해야 하므로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영난에 빠진 『동명』은 마침내 1923년 6월 폐간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남선은 그러나 l924년3월 다시 일간신문 시대일보를 발간했다.
그때까지 쓰던 사무실은 비좁고 시설도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넓고 큰 명동의 동순태빌딩(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으로 사옥을 옮겼다.
또 인사개편을 단행해 사장에 최남선, 편집국장에 강학문, 논세반에 안재홍·변영만, 정치부장에 안재홍, 사회부장에 염상섭등 당당한 진용으로 출발했다.
시대일보는 동아일보 보다 4년이나 늦게 나와 이미 기초를 닦아놓은 동아일보에 당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육당 최남선의 개인적인 성과가 컸고 신문 제작간부진도 정상급 인물들이었으므로 독자의 인기가 예상 밖으로 열렬해 발행부수가 동아일보를 능가했다.
우리 집에서도 동아일보를 끊고 시대일보를 구독할 정도였다.
나는 그때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약간 철이 들어있을 때였으므로 다소 신문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지면은 어딘지 어둡고 딱딱한데 비해 시대일보는 훨씬 부드럽고 참신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어른들은 왜 동아일보를 그냥 보지 않고 다른 신문으로 바꾸느냐고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시대일보로 바꿔버렸다.
시대일보는 독자들의 환영을 받아 잘 해나가더니 창간한지 넉달이 못돼 파탄이 생겼다.
돈을 댄다는 사람이 돈을 안대는 바람에 보천교(차경석이 전라도 정읍에서 창건한 유사종교)에서 돈을 빌려 쓴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장인 최남선이 물러나게 되었다.
육당이 물러난 후 신문은 다른 사람에 의해 속간되었지만 지면이 창간 당시의 색채를 잃어 독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나도 시대일보를 끊고 다시 동아일보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육당은 이 실패로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저술에만 힘쓰게 되었다. 출자한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드는 바람에 그것을 믿고 덜컥 신문을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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