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산물 ″브랜드화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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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경기도 포천에서 밭 3천여 평에 배추농사를 짓는 천모씨(42)는 집 주변 텃밭 2백 평에는 무공해 배추·고추·파 등을 키우고있다. 밖에 내다 파는 배추에는 비료와 농약을 듬뿍 주지만 퇴비와 거름만으로 키운 무공해 푸성귀들은 내다 팔지 않는다.
가족들의 반찬거리나 서울에 있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선물로만 준다.
『농약·비료가 안 좋다는 걸 농민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천씨의 말이다.
천씨는 3년 전부터 무공해 채소를 재배해 30∼40%정도 비싼 값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지난해 「무공해 채소에도 농약과 비료를 친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천씨의 채소들도 도매금으로 가짜로 몰렸다. 그 뒤로는 아예 자가소비용을 제외하고는 무공해상품을 재배하지 않는다.
농약이나 비료를 안치면 소출이 30%쯤 줄어들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깨끗한 무공해 농산물을 기르고 싶지요. 하지만 가짜들 때문에 마음뿐입니다.』 천씨의 푸념이다.
경기도이천군 대월·신둔농협에서는 관내에서 생산된 쌀을「진상미」라는 3kg들이 소포장으로 만들어 보통 일반미보다 30%쯤 비싼 값으로 내다 판다.
이 지역의 쌀이 예전 궁궐에 진상되었다는 사실을 상품명으로 해 소비자들에게 고급이미지를 심고 다른 지역의 쌀과 차별 짓기 위한 것이다.
『다른 지역의 쌀이 이천에 흘러 들어와 도정공장에서 가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비자의 눈으로는 구별이 안돼 진짜 이천쌀을 지키기가 무척 힘듭니다.』 이곳 농협관계자의 말이다.
가짜 무공해 농수산물 때문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지역특산농수산물을 상품으로 개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천의 쌀, 순창의 고추장, 기장의 미역, 영양고추와 영광굴비등은 지역명과 함께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농협도 「내고장 으뜸품목운동」 「얼굴상품 갖기 운동」등을 펼치면서 이같은 추세를 북돋우고 있다.
정부에서도 UR(우루과이라운드)협상타결에 따른 시장개방이 불가피해질 경우 가장 효과적인 대책의 하나로 우수농산물상품화를 꼽고 있다.
소비자의 반응도 좋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요도 다양화되고 있고 비전문가인 소비자로서는 그나마 단위농협이나 생산자조합에서 품질을 보증한다는 믿음도 가기 때문이다.
농산물 브랜드화의 바람을 타고 농협과 우체국을 이용한 특산물우편판매도 늘어 지난해는 모두 2백80여종의 품목에 70억원 어치가 팔려나갔다.
백화점도 소비자성향의 변화에 맞추어 잇따라 지방특산물전을 열고 있고 H백화점의 경우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생산자의 품질보증서까지 붙여 판매하고있다.
그러나 조금 이름만 얻으면 가짜가 생겨나고 생산자·농협·정부·유통업자 누구도 품질관리에 책임을 안지려는 풍토 때문에 농수산물브랜드화의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지난해 8윌 경제기획원은 백화점과 대형슈퍼에서 팔리는 경기미에 대해 판매금지조치를 내렸다. 기획원의 조사결과 당시 산지에시의 경기미는 이미 재고까지 바닥이 났는데도 도정업자와 일부 유명유통업자들이 짜고 다른 일반미를 경기미로 포장만 바꿔 속여 팔거나 심지어 통일계쌀까지 섞어 팔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등산수박의 경우 만생종이라 8월 중순 이후에야 시중에 나오는데 7월부터 전국에는 무등산수박이 판을 친다. 간단한 상표하나로 가격이 2배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우는 금메달수박이나 금싸라기참외 등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일부 무허가 인쇄공장들은 상인들과 짜고 유명농산물상표를 대량으로 복제,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업자들의 이런 농간을 현재로선 단속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산지농민들은 워낙 영세업자들이라 이런 대규모 부정유통을 적발·단속할 엄두도 못 내고 있고 농협이나 정부도 팔짱을 끼고 있다. 경찰도 기껏 중국산조기에 유해색소를 칠해 국산으로 둔갑해 날던 소매상 몇 명을 잡는데 그쳤음뿐 다른 단속실적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생산농어민들이 자신들의 생산품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허청통계에 따르면 89년 말 현재 상품출원 3만9천8백건 가운데 농수산물은 경북능금·영양고추·논산의 메꽃청상추등 10개가 채 되지 못한다. 상표나 의장등록을 해도 법의 보호가 미흡한데 등록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표도용이나 유사상품에 대해 단속할 법적 근거도 없는 셈이다.
결국 이런 사각지대에서 농어민들은 애써 가꾼 상품들이 가짜에 밀러 제값을 받지 못하고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터무니없는 비싼 값을 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농협은 지방특산물 2백여개를 선정, 포장과 상표·규격상자를 제정할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예산부족을 이유로 계획에 머물고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농어민, 농·수협, 정부가 힘을 모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농수산품중 상표 및 품질관리가 비교적 잘되고 있는 것은 가공식품분야다. 이 분야는 앞으로 농어민 등 생산자들이 영역을 개척해야할 분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농수산물이 상품으로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유통업체들이 생산자를 지배하거나 위탁생산을 시키기보다 생산자 스스로 유통과정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룩됐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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