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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연설, 노무현의 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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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더피는 장례식을 치르고 두문불출했습니다. 충격과 좌절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사를 포기하려 했습니다. 월 스트리트에서도 KBW는 끝났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마음을 달리 먹었습니다. 회사를 재건하는 게 희생당한 직원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그는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 옛 동료들이 회사를 살리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거래업체들도 도왔습니다. KBW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직원들이 9.11 때보다 두 배로 늘어났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더피는 9.11 직후 극심한 자금난을 겪으면서도 목숨을 잃은 직원들의 유가족들에게 4000만 달러(약 380억원)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봉급도 계속 지급했습니다. 유가족들의 의료비와 학비도 지원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그를 '기업 책임(corporate responsibility)'의 모범 사례로 소개했습니다. '경제 국정연설(State of the Economy)'에서 "더피처럼 역경을 딛고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며, 책임을 다하는 시민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나라가 미국"이라며 "내가 이런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점에 긍지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디켐베 무톰보는 미국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입니다. 휴스턴 로키츠 소속인 그는 농구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선행을 하는 데도 으뜸입니다. 그는 1997년 고국 콩고에 재단을 설립해 병원을 지어주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가 그동안 기부한 돈은 지난해 4월의 1500만 달러를 포함해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의회에서 '국정연설(the State of the Union address)'을 하면서 그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한 교육용 비디오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줄리 아이그너 클라크, 지하철 역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철길에 뛰어들어 실족한 남자를 구한 웨슬리 오트레이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처럼 용기 있고 어진 이들의 행동에서 미국의 정신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두 연설 중 다른 내용은 찬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피나 무톰보에 관한 얘기는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말은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소인을 거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산 자를 묻을 수도 있고, 거인을 두드려 없앨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남겼습니다. 말이나 연설의 내용에 따라 그 효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는 얘기죠.

부시 대통령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영웅들을 소개한 대목은 대중에게 용기와 이타심을 고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사회가 더 많은 '거인'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청중에게 준 것이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떠올려 봤습니다. 얼마 전 국정연설은 자기 자랑과 남 탓을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04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자살의 한 동기가 된 "좋은 학교 나온 사람이… 머리 조아리고…"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파괴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 지도자들께선, 남을 추어올리는 연설과 남 탓을 하는 연설 중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