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4)<제86화>경성야화(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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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 외숙은 해주에서 관리생활을 했는데 외삼촌인 위창 오세창이 독립운동의 선봉으로 감옥에 들어가자 더 이상 총독부 관리생활은 할 수 없다며 사직서를 냈다.
위창댁에서는 서대문 감옥 근처에 셋방을 하나 얻은 다음 거기서 하루 세끼 음식을 만들어 미결감에 차입해주었다.
33인 거의 모두가 이런 식으로 가족들이 서대문감옥 근처에서 만들어 들여보내는 사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사람인 육당 최남선은 이런 사식을 마다하고 감옥에서 주는 관식을 먹었다. 그는 당시 나이도 젊었지만 음식같은 것에 구애하지 않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면서도 가족에게 써 보낸 편지에는『감옥이 어떻게 좋은지 고대광실 같고, 여기서 먹는 관식이 진수성찬 같으니 집에서는 아무 염려말라』고 하였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을 무렵 그는 독립선언문 기초작업을 하던 어느 친지 집에 은신해 있었다. 경찰은 독립선언문을 쓴 사람이 최남선임에 틀림없다고 판단, 집으로 닥쳐 와 체포하려 하였으나 집에 없었으므로 대신 현씨 부인을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남선은 집대문 앞「굽은 다리」(곡교) 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최남선·송진우 등이 다 주동인물이지만 이들 모두가 감옥에 들어가면 뒷일을 볼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이 두 사람은 33인중에서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특히 최남선이 체포된 것은 그가 독립선언서를 직접 썼기 때문이었다.
일본경찰이 처음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 백방으로 조사할 당시 총독부 경무국에서 우리나라 잡지 원고를 검열하던 일본인 경부 아이바 기요시(상양청)란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쓸만한 사람은 최남선 밖에 없다고 판단, 마침내 최남선을 검거한 것이었다.
최남선은 그때『소년』이란 잡지를 비롯, 『청춘』을 발간하고 있었으므로 검열관은 최남선의 필적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최남선 집과 왕래가 잦았던 큰 고모를 통해 우리집에서 알게 되었고, 또 위창댁에는 어머니가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미결감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감옥바라지를 가장 호화스럽게한 것은 33인 대표인 손범희 집이었다고 한다.
서대문 감옥 근처에 짐 한 채를 세 얻어 놓고 주산월이라는 손범희의 소실이 음식을 굉장하게 차려 미결감으로 들여보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 덕에 잘 얻어 먹었다고 하였다.
낮에는 식구들이 밖에 나와 판장 틈으로 감옥의 뜰을 들여다보는데, 권동진·오세창같은 분들은 뜰에 나와 운동을 하고 넓은 멍석 위에 나란히 앉아 그물을 뜨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 하였다.
민족대표로 손범희가 추대되긴 했지만 후에 최남선이 필자에게 털어놓은 얘기는 다음과 같다.
즉 처음 최린·송진우·최남선·현상윤등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독립운동을 숙의할 당시에는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을 비롯, 윤용구·김윤식·박영효 가운데 한 분을 민족대표로 추대키로 결정하고 이들과 비밀리에 교섭을 벌였다.
이런 거물급 인사를 대표로 내세워야 민중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규설은 자기는 고종황제의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놓을 수 있지만「민중」이니「민족」이니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그 민중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할 생각은 없다며 민족대표가 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개학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던 김윤식도 똑같은 대답이었고, 그밖의 사람들도 대개 이런 뜻으로 민족대표 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로 명망높은 거물급을 추대할 것을 단념하고 처음 이 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대표로 추대한 것이었다.
김윤식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민중의 호응이 대단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소리가 터져 나오고 합방 때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들에 민중의 지탄이 대단했다.
이에 고무된 김윤식이 일본정부에 독립승인 최고장을 제출했는데 이것을 빌미로 일본은 그에게 준 자작 작위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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