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실러 교수의 '멋진 신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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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할 때에는 괴짜 경제학자가 그려내는 큰 꿈을 따라가 보는 것도 위안이 된다. 이틀 전에 만났던 예일대학의 로버트 실러 교수가 재미있다며 추천한 웹사이트가 www.MyRichUncle.com이다. 대학교육 학자금이 모자랄 때 학생들이 이곳에 들어가 신청하면 입학예정학교 학과 성적 등을 감안해 지원 여부와 규모를 결정해 준다.

특이한 것은 상환방식인데 이자율이 정해져 있는 일반 학자금 대출과 달리 졸업 후의 소득 수준에 맞추어 갚아 나간다는 것이다. 취직하고 나서부터 일정기간 소득의 2~3% 정도씩 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받았던 금액보다 훨씬 적게 갚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처럼 빚을 얻더라도 장래의 소득과 연계해 상환하기로 한다면 파산의 위험이 크게 줄어든다. 부도 직전의 카드회사, 양산되는 신용불량자, 농가부채 문제들로 속을 썩이고 있는 우리한테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

실러 교수는 이 대출제도를 포함해 여섯 가지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이것으로 21세기의 경제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3년 전 그는 '이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저서로 미국 증시의 거품붕괴를 정확하게 예측해, 주식얘기만 나오면 그린스펀 연준(聯準) 의장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번에는 우리가 금세기에 당면하게 될 위험(risk)이 엄청난 데도 이에 관한 인식과 대비가 지극히 소홀하다고 경고한다. 올해 봄에 발간된 그의 신저 '새로운 금융질서'(정지만 외 옮김, 민미디어 펴냄)는 문제의 제기와 함께 새로운 금융기법과 정보기술의 도움으로 사람들이 경제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실러의 아이디어 중 셋은 민간 부문에서, 그리고 나머지 셋은 정부가 주도해서 해야 할 일이다. 먼저 증권회사들은 경제의 전반적인 위험이 반영된 성장률 등 거시경제지표를 증권화해 거래할 수 있는 거시적 시장(Macro Markets)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보험회사는 기존의 생명.종신보험보다 더 포괄적인 생계보험과 주택가격안정 보험제도를, 그리고 은행 쪽은 소득연계 대출제도를 세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부문에서 해야 할 일은 소득분배가 더 악화하지 않도록 세율을 조정해 가는 방식의 불평등 보험, 세대 간 위험부담이 공정한 사회보험제도, 위험관리를 위한 국제적 협약 등을 추진해 가는 것이다.

실러 교수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가족이나 동족은 물론 세계 각 국민과도 네트워크를 이루어 위험을 분산해 공유한다. 사실 위험이라는 것은 슬픔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이 나눌수록 작아지게 마련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누구도 장래의 경제적 불안 때문에 주눅들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고 과감하게 추진해 갈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커짐에 따라 전 인류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원대한 꿈에 대한 회의론도 많으며 특히 도덕적 해이, 범세계적인 제도의 관리자 선정 문제 등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 보면 석유파동과 수차례 정치위기가 있었지만 고도성장에 도취해 위험관리를 등한시해 왔다. 외환위기 이후에야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는데 많은 국민은 지금 자신의 미래에 관해 크게 불안해하며 위축돼 있다. 위험에서 해방돼 인간다운 삶을 누리면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세상이 만들어져야 한다. 현실성을 두고 논란이 있긴 하지만 실러 교수의 과감한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어야 할 때다.

노성태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