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2. 걸프사와 자재 운송 계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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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테헤란에 도착하자 C의 연락을 받은 한국 대사관 직원 한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에게서 사업 내용과 이란 국내 사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세계적 메이저 정유사인 걸프와 이란 왕실이 유전을 공동 개발, 석유를 채굴해 판매하고 있었다. 국영 석유회사 경영에도 왕실과 걸프가 공동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란에서 석유 관련 사업권을 따내자면 걸프 측은 물론 왕실 실력자의 눈에도 들어야 했다.

이란인 사장은 한국에서 온 낯선 운수업자를 깔보는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일행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수송 물동량을 제시했다.

"물동량은 이 정도요. 이걸 바탕으로 이른 시일 안에 견적서를 만들어 오시오."

그러면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견적서를 만들었다. 며칠 후 이란인 사장에게 견적서를 내밀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그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처음 일을 해보는 한국인이 영국 스탠더드(기준)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나는 오기가 솟구쳤다.

"이렇게 합시다. 계약 후 한달 안에 천재지변이 없는 한 견적서대로 물동량이 처리되지 않으면 당신은 대금을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손해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좋다고 했다.

"대신 한달 작업량을 20일 만에 끝내면 나머지 열흘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줘야 합니다."

한참 생각하던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것도 좋소. 그러나 자재 수송량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할 경우 엄청난 대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당장 계약서를 작성했다. 걸프 측에서 내게 제시한 작업은 유럽의 서쪽 끝인 프랑스 파리에서 유전용 자재를 트럭에 싣고 동유럽과 발칸반도.터키 등을 지나 테헤란에 이르는 옛 실크로드를 거슬러 달리는 대장정이었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온 영국인 트럭 운전기사들은 평균 12일 걸려 이 길을 운행했다. 왕복 24일, 거의 한달이 소요되는 머나먼 길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장애가 많은 길이기도 했다.

이 일을 맡았던 영국인 운전기사들은 그 머나먼 길을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대형 트럭의 운전석 뒤편에 작은 침대를 들여놓고 부인이나 애인 등을 태우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이 길에 한국인 운전기사들을 투입하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먼 이국으로 돈을 벌러 가면서 트럭에 아내를 태우고 다니겠다는 호사스러운 생각을 하는 한국인은 없었다. 아내와 함께 먹고 자고 놀며 낭비하는 시간을 고스란히 작업에 쏟아부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눈만 뜨면 달리고 또 달릴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아무리 오랜 기간이라도 멀리 타국에 가서 고생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참고 견디는 부인들이 있다.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부인은 잘 참아냈다. 그들은 남편과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못 견디는 상당수 유럽 여성의 사고방식과는 바탕부터 달랐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한국 운전기사들의 경쟁력'인 동시에 '한국 부인들의 경쟁력'이었다. 유럽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인만의 비밀스러운 힘이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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