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72)-<제86화>경성야화(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귀했던 쌀>
그때 우리집은 스물이 넘는 대가족으로 한 집에서 한 솥 밥을 먹고살았으니 혼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옛날에 있었다는 종(비)들은 없어졌고 행랑어멈, 요즘말로 식모라는 안잠자기가 주로 아래 허드렛일을 하고, 윗 일은 셋째큰 어머니와 넷째인 우리 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할머니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아들 네 분 중에서 큰아버지는 양자로 딴 집에 나가 살고 둘째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했는데 상처를 해서 홀아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셋째 백모와 어머니가 집안 일을 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잠자기는 집안에서 자고 먹고 일을 하는 하녀인 셈인데 대개살림이 어려운 마흔이나 쉰살 가량의 중년 부인네가 살림은 며느리한테 맡기고 남의 집에 살면서 일을 해 주고 월급을 받아 살림에 보태 쓰게 하는 가정부를 말한다.
이들은 살림솜씨가 능숙해서 젊은 주인댁을 가르쳐가면서 일을 했다.
아침저녁 반찬거리를 사다 노인네 입에 맞도록, 애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그밖에 빨래, 김장, 봄·가을에 한번씩 고추장·간장 담그기, 철 따라 의복만들기, 다리미질, 바느질 등 일이 많았다.
지금같이 만들어 파는 음식이나 의복이 없어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하니 집안 일이 한이 없었다. 부인네들은 온종일 일에 파묻혀서 쉴 틈이 없었다.
이런 일들을 두 어머니와 안잠자기·행랑어멈 등 네 사람이 해야했으므로 몹시 바빴다.
행랑어멈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그때는 조금 큰집에는 안채·사랑채· 행랑채 등 세 채가 있었다.
안채는 주부가 살림하는 집안의 중심이고, 사랑채는 남자들이 글 읽고 손님 접대하는 서재 겸 응접실이다.
행랑채는 대문 옆에 있는데 사나이는 아랫두리 집안일과 대문단속을, 여자는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밥을 얻어다가 식구들을 먹이는 것이 주임무였다.
행랑어멈의 경우 밥은 안에서 얻어다 먹지만 제 살림을 따로 해야 하므로 안잠자기보다 일을 덜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반찬을 만들어 스무 식구가 식사를 해야 하므로 아침밥은 언제나 열시 열한시가 되어야 먹게 되고, 점심은 두시 세시, 저녁은 깜깜한 일곱시 여덟시에나 먹게 되었다.
이렇게 아침이 늦으므로 어린애들은 여덟시나 아홉시에 조반이라고 해 다른 음식을 사다 먹여야만 했다.
나는 늦은 아침밥 때까지 참을 수 없어서 어머니가 하인을 시켜 팥죽을 사다가 먹게 했는데 5리만 주면 한 사발 가득 사올 수 있었다. 리(이)라는 것은 전(전)아래의 화폐단위인데 동전에 5리짜리가 있었다.
또 냥(양)이라는 화폐단위가 있었는데 2전에 해당했다.
따라서 l0전은 닷(5)냥, 1원은 쉰(50)냥이라고 불렀고 이 닷냥, 쉰냥 하는 말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사용됐었다.
그러다 어느틈엔지 한냥짜리 동전과 5리짜리 동전이 없어졌고 20전짜리 은전은 그 뒤까지 있었다.
50전짜리 커다란 은전도 훨씬 뒤까지 통용되어서 정월에 세배할 때 최고액으로 받은 일이 기억난다. 이것이 내가 보통학교 다닐 때의 일이니까 1920년대까지 통용되었을 것이다.
그때 밥은 어른들만 하얀 백반을 먹었지 애들이나 아낙네들은 팥밥을 많이 먹었다.
그때는 팥이 쌌던 모양으로 팥을 많이 섞어 먹었는데 이 때문에 숭늉 빛깔이 빨갛고 애들이 방귀를 뀌면「팥밥방귀」라고 해서 몹시 구렸다.
흰쌀은 값이 비쌌던지 할아버지는 우리들이 소반 아래로 밥알을 흘리면 다시 집어먹으라고 호령했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집 안팎을 살피고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었는데 수채 구멍에 허옇게 밥 찌꺼기가 흘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 날에는 안잠자기와 행랑어멈은 불호령을 받아야 했고, 그 흰 밥톨을 도로 먹어야만 했다.
농사꾼이 땀을 흘려서 지은 것인데 어떻게 그 귀한 쌀을 고맙게 다 먹지 않고 수채 구멍에 내버리느냐, 그런 천벌을 받을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할아버지의 말씀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