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총장과 표절 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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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작(多作) 교수일수록 표절 시비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몇 년 전 100여 권의 저서를 낸 실력 있는 교수가 제자로부터 뜻밖의 공격을 받았는데, 학계는 그 제자의 비상식적 행위로 판단했고 사태는 곧 수습되었다. 그러니, 아예 연구에서 손을 뗐거나 과작(寡作)일 경우는 표절 시비에 휘말릴 기회도 없다. 사회활동이 왕성하고 지명도가 높은 교수들도 표절 시비에 걸려들 위험은 높아진다. 시간을 쪼개서 뭔가 써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업적을 내야 한다는 중압감은 모든 교수에게 가해지는 공통적 부담이지만, 대학 혁신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열정적인 교수들, 또는 총장 후보군에 속하는 역량 있는 교수들은 연구를 일단 제쳐둘 수밖에 없으니 일종의 딜레마다.

대학에 선거제도가 도입된 1987년 이후 이런 딜레마는 증폭되었다. 선비의 묵향(墨香)이 가득한 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대학총장은 엄청난 사회적 존경을 누린다. 대통령이 가십거리가 되고 네티즌들이 추기경을 난타하는 세태에도 대학총장에게만은 깍듯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 한국 사회다. 그런데 선거제도는 총장이 되고자 하는 교수들을 학자에서 정치가로 변모시켰다. '4년 단임의 총장'이 되려면 교수들에게서 표를 '사야' 한다. 연구실에 깊숙이 몸을 묻은 교수들은 인격과 학식이 아무리 고매해도 표를 살 방법이 없고 대학 일에 눈을 돌릴 의향도 여유도 없다. 의욕이 있는 사람은 안팎으로 뛰어야 한다. 적어도 4년 이상을 뛰어다녀야 '학교정치의 고수'가 되고, 인지도가 높아지고,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 능력이란 플라톤의 아카데미처럼 '지성인의 도시'를 이끄는 철학적 지혜가 아니라 복합적인 지식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거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능란함, 그것이다.

이런 사정은 미국과 유럽 대학에서 이미 보편적인 추세로 자리 잡았다. 외국 유명대학들은 1990년대까지 산학협동 창구를 활용해 매머드 기관으로 성장했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은 학생 수 10만 명, 개설 교과목 1만 개, 평생교육과정 등록생이 20만 명이었다. 고용인원이 4만 명, 연간 4000명의 신생아가 캠퍼스병원에서 태어났고, 재정규모가 5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정도 규모의 연구대학이 미 전역에 125개나 존재한다. 덩치는 조금 작지만 한국도 만만치 많다. 서울대의 연간 재정규모는 1조6000억원(병원 포함), 연세대와 고려대는 대략 1조원에 근접한다. 이런 기구를 탈없이 운영하려면 학문적 역량보다 경영마인드가 필수적임은 자명하다. 총장의 모금능력이 중시되고, '얼마를 거두었나'가 업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모든 대학의 모든 대학과의 전쟁'에서 총장이 당면한 과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진리는 '접근해 가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진리를 '생산한다'. 대학이 '유용한 지식' 생산에 무게를 둘수록 존재론적 지식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자들의 불만은 더불어 커진다. 총장이 철학자들의 손에서 처방약을 빼앗아 과학자들에게 넘겼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부조리를 들추는 데 더 익숙한 교수들로부터 뾰족한 대안이 나올 리 없다. 이 시대의 총장은 자신의 은닉처에서 논쟁을 즐기는 교수들 간의 '내부 정치'와 국가와 기업의 신속한 변신에 적응하는 '외부 정치' 간의 괴리를 마치 연금술사처럼 용접해야 한다.

어쨌든 표절은 교수 윤리에 어긋난다. 고려대 총장의 경우 아직 진위가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상처 난 자존심을 달래고, 차제에 총장 역할의 시대적 변화상을 고려해봄 직하다. 이 시대의 총장은 '지성의 수호자' '능숙한 조정자' '추진력 있는 CEO', 이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가. 격리된 개인주의로 무장한 채 마치 소립자처럼 개별 시민권을 행사하는 '조직적 무정부'인 대학에서 어떤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