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밤하늘의 모습 왜 달라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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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수천억 곱하기 수천억 개의 엄청난 별이 우주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블랙홀 같은 암흑물질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그나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수천억 개의 은하 중에서 두세 개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그 두세 개 은하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가. 그렇지 않다.

반지름이 5만 광년인 우리 은하 안으로 시야를 국한시켜 보자. 우리 은하의 반대편에 있는 별에서 떠난 빛은 10만년 전에 그 별을 떠난 것이다. 우주적 규모로 볼 때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 동안에 그 별은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 별이 사라지는 사건이 지금 일어난다 해도 10만년이 지나기 전에는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앞으로 10만년이 지날 때까지 우리는 그 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밤하늘의 빛 중에는 몇초 전에 달에서 출발한 것도 있지만, 10만년 전에 우리 은하의 반대편에서 떠난 빛도 있고, 안드로메다 은하를 떠나 2백만년의 여행을 마치고 지금 막 지구에 도착한 빛도 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다른 시간의 사건들이 지금 이 순간에 중첩돼 나타난 것이 밤하늘의 모습이다. 그건 과거의 영상이고 잔영이지 현재의 모습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광활한 우주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앞에 놓인 책상의 표면을 보거나 만지면서 매끄럽다고 생각하지만, 전자현미경으로 찍어보면 그 표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보다 더 요철이 심하다. 책상 표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책상의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현재의 우주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눈에 문제가 있거나 관측 기술이 덜 발달해서가 아니다. 그건 우주의 기본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다. 책상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지금의 우리가 박테리아를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일 굉장히 큰 존재라면 책상이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아주 작은 존재라면 굉장히 요철이 심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원자보다 더 작은 존재라면 뿌연 전자의 구름만 볼지도 모른다.

어느 게 진짜 책상의 모습인가. 책상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건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책상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그것을 보느냐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은 우리의 감각과 세계 구조가 어떻게 맞물려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블랙홀 같은 것이 있지만 그걸 보지 못하는 세계, 어느 에너지 상태 이하에는 물질이 꽉 차 있지만 그걸 아무것도 없는 진공이라고 느끼는 세계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다. 우리가 아는 세계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일 뿐이다.

이렇게 모든 게 상대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치관이 다 의미를 갖고 모든 행동이 다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뜻한 봄에 씨를 뿌려야 싹을 얻듯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인류의 문명과 역사, 우리 사회의 여러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강요되는 세계는 아니어서, 뜰 앞의 나무는 화가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이고 별빛 하나에도 시인은 추억과 사랑과 어머니를 담을 수 있다. 나무가 한 가지 모습이 아니고 별빛이 단지 전자기 파동만은 아닌 세계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그런 여백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예술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쉬이 아침이 오는 안타까움에도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서, 가을로 가득 찬 하늘에서 별을 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양형진 고려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