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국 접촉 잦아졌다|관계개선 움직임과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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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의 대외정책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면서 미-북한 관계에 새로운 관측들이 나오고있다.
키미트 미 국무차관은 지난 15일 북한의 핵사찰을 미-북한간 국교정상화로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이 핵사찰협정에 조인하면 북한과의 대화 격상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한시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도 유엔에 가입하게 되면 미국과 수교협상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북한과 미 수교상태를 완강히 고수하면서도 지난 87년부터 지난 5월까지 모두 16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참사관 급의 비공식 접촉을 갖고있다.
미국은 이 접촉수준을 높이는 문제를 이미 고려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그레그 주한 미 대사는 『한국이 원한다면 접촉수준을 대사 급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었다.

<대화수준 격상고려>
우리 외무부의 한 관계자도 북한의 개방유도를 위해서는 이 대화의 격을 대사 급으로 올리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북한이 취하고 있는 전향적인 몇 가지 조치들과 맞물려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번져가고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북한은 지난 5월27일 유엔가입의사를 밝혔고, 지난 7일에는 핵 안전협정에 서명하겠다는 뜻을 국제원자력기구에 밝혔다.
북한은 이를 계기로 해 미국에 대한 접근노력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밝힌 최근의 태도는 그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당히 당황하게 할 정도로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도 이에 호응하듯 각종 민간연구 단체의 북한 방문이 줄을 잇고, 북한 고위 당국자의 미국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물론 『현재 시점에서 미국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폭넓은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바우처 미 국무부 부 대변인)는 지극히 냉담한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소사이어티 방문단의 부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남궁건씨는 『미국과 북한은 오는 9월께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 늦어도 내년 봄쯤엔 연락사무소를 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해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민간단체의 북한 방문은 꾸준히 계속되어 온 것이지만 한시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개인 자격」이란 명복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미-북한 관계가 진전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한 부위원장은 방미기간 중 솔로몬 국무부 차관보를 비롯해 많은 전·현직관리를 만났다. 그는 『이번 여행에는 여행지나 의사소통 등에 전혀 지장이 없었으며, 이 같은 미국의 자세는 전례 없는 새로운 일로 태도를 좋게 하려는 조짐』이라고 말했다.
이런 비공식 민간 접촉을 공식적인 정부관리간의 접촉과 혼동해서는 안되겠지만 미 수교상태에 있는 나라들의 접촉방식을 감안할 때 심상한 일만은 아니다.
외무부의 한 고위관리도 『이러한 접촉에는 정부간의 비공식 의사타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관측했다.
바우처 부대변인은 지난 21일 정례 브리핑에서 대 북한관계를 개선시킬 전제조건을 ▲북한의 핵 안전협정 서명 ▲남북대화의 의미 있는 진전 ▲미군유해 송환 ▲테러사용 포기 등으로 재확인했다.

<테러행위 자제 간주>
이 같은 미국의 대북 관계개선 4개 전제조건에 대해 북한이 보이고 있는 태도가 미국의 요구를 상당부분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북한이 유엔 동시가입을 수용한 것은 「남북대화의 의미 있는 진전」조항에 성의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테러행위라는 것도 미국이 테러국가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KAL기 사건 이후에는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군 유해문제는 지난해 5월 5구의 유해를 인도한 이후 지난 24일 또다시 11구의 유해를 인도한 이외에 이 문제를 다룰 양국 공동위원회를 구성키로 해 해결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북한이 시리아 등에 미사일을 파는 문제도 미국이 북경접촉에서 수 차례 경고하고 있으나 북한은 이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판매하고 있는 스커드미사일은 미사일기술제한체제(MTCR)에 위반되는 것이긴 하나 미국은 이것을 관계개선의 장애조건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외무부관리가 말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걸림돌은 핵사찰문제 뿐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중·소도 핵 문제 압력>
이 문제 외에 미국을 움직일만한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한 북한은 최대한의 대가를 받아내고서야 사찰에 응하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①핵 안전협정에 서명하고 ②모든 핵 시설에 대한 충실한 사찰이행 ③핵 재처리 시설의 폐기 등 세 가지다.
이 가운데 핵 비 확산조약(NPT)의 의무는 ①과 ②다. 그러나 그나마 ②는 북한이 합의해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북한이 상업용으로서 가질 필요가 없는 재처리시설도 폐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했던 바솔로뮤 미 국제안보담당 국무차관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목적 이의에는 재처리시설을 가질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북한의 김영남 외교부장은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에 배치된 미군의 핵무기에 대한 사찰 및 철수가 이루어지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문서로 보강하기 전에는 핵사찰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미 핵 안전협정 서명의사 표명 이후 20개 정당·사회단체 연합성명 등 9번에 걸친 성명·담화와 박길연 주 유엔대사, 주창준 주 중국대사, 손성필 주 소 대사 등 해외주재대사 7명이 나서 「미군 핵 철거」 「남북 동시 핵사찰」 「한반도 비 핵지대화」등을 주장해왔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핵 개발 가능성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국제적 의무이상으로 핵 재처리 시설의 폐기까지 요구하고 있는데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런 조건은 북한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고 미-북한간의 조기 관계개선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전체의 전략적 차원에서 북한의 핵 위협이 대두되는 상황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
때문에 이것을 뒤집어 보면 미-북한간의 관계의 완급을 조정할 카드라고도 볼 수 있다.
한·미·일 3국이 정책협의회를 갖는 등 여러 경로에서 한반도의 핵 배치문제를 논의하게된 것도 이런 문제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미 북한의 핵에 대해선 소·중국도 압박을 가하고 있어 이것이 어떤 식으로 조정되느냐에 따라 미-북한간의 관계개선의 템포도 정해지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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