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9)|<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44)|해방 직후의 「홍구 공원」|이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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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들의 상해 생활은 분주하면서도 보람있었다. 임시 정부 건물·사마로·가든브리지·브로드웨이 맨션·여도·대세계 등 명소라는 곳은 발 닿는 대로 다 돌아다녔다.
그런데 임정 건물을 찾느라 우리들은 퍽 애를 먹었다. 요사이 신문을 보면 우리 관광객들도 그곳을 찾는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그 역사 현장에 표지판이 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날 우리들은 홍구 공원에 갔었다. 193l년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에 쳐들어오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던 장개석을 미지근하게 본 중국 학생들은 노신 (중국 문호)의 시체를 메고 상해 시가를 누볐었다. 일본과의 결전을 독촉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위의 것 출발지가 바로 홍구 공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홍구 공원을 찾았던 것은 그러한 역사 탐방은 아니었다. 14년 전 (l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윤의사 의거는 날로 쇠약해지는 우리 임정을 소생시키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고, 또 만주를 잃고 허덕이는 중국에는 용기와 분투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주권을 빼앗긴 뒤 많은 우리 동포들은 고국을 등지고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 많은 동포 모두가 다 음으로 양으로 안중근·윤봉길 의사의 덕을 입었다. 목숨을 던진 두 의사에 크게 감동한 중국 사람들은 조선 사람 모두에게 존경과 환대를 베풀었다.
독립지사도, 유람객도, 장사꾼도 다 두분 의사의 덕을 본 것이다. 임정이 수립 된지 14년만에 장개석이 처음으로 김구를 만나자고 했고, 또 도움을 준 것도 윤 의사 의거 후부터였다.
홍구 공원에는 마땅히 윤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모두 귀국선을 기다리는 난민들뿐이어서 돈 얘기는커녕 도대체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우리들은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매일 홍구 공원에 나가 묘안을 찾지 못해 서성대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억대 부자인 손창식이라는 조선 사람을 찾아가 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거처는 자주 바뀌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지만 꽤 알려진 사람이니까 못 찾을 것도 없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사흘 만에야 겨우 손씨 집을 찾아냈다.
그는 옛 프랑스 조계에 살고 있었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큰 양옥이었다. 그 정원 잔디밭 그늘에 도사리고 있던 맹견들의 눈초리가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중국인 수위와 복잡한 문답을 10여분 했다.
겨우 대문이 열리고 나와 김영주는 응접실에 안내되었다. 곧 단정하게 양장을 한 초로의 부인이 나왔는데 그녀는 『우리 사위를 왜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교양 있는 조선말이어서 우리도 정중하게 찾아온 뜻을 설명했다. 그녀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는 이를테면 우리의 사람됨을 떠보는 인물 테스트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장본인 손씨가 나타났는데 그는 한 묶음의 서류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온화한 말씨로 『나는 중경 우리 임시 정부에도 독립 자금을 보냈습니다. 자, 이걸 보십시오. l944년9월 10만 달러, 그리고 8·15해방 후에 또 10만 달러, 이렇게 20만 달러를 대드렸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독립지사들을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이 서류가 나의 결백을 증명해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그에 대한 예비 지식을 다소나마 들은바 있었다. 그는 일본군을 끼고 정밀 기계를 제조·납품하면서 10년 동안에 거액을 벌었다는 것이고 8·15후 중국군 동남 지구 사령부 주호 (주준=상해 주둔) 판사처에 전범으로 구금되었다가 얼마 전에야 물려났던 것이다.
풀려난 것은 무슨 야바위 속인지 모르나 막상 이름난 친일 군납 업자가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밀송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우리 임시정부가 아무리 궁했을지라도 그런 친일파의 돈을 어떻게 받아썼겠는가 말이다. 나는 절대로 받을 리 없다고 단정했다.
손씨는 서류 보따리 (가방이 아니고 책보자기였다)를 물더니 맨 위에 있는 종이 한장을 나와 김영주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언뜻 보니 독립 자금 수령자의 이름은 정항범이었다.
독자 여러분들 중에는 정항범을 아시는 분도 많을 줄 안다 (8·15후 신한 공사 (구동척) 총재·주일 대표부 대사 등을 역임). 그러나 해방 당시 중국에서 그의 행적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회로 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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