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풀뿌리」는 싹틀것/소설가 송영(유세장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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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낡은틀 못깬 정치권 시험받는 느낌
『요즘 선거법은 법이 아닙니다. 선거를 하지 말라는 법이지,이게 어디 선거를 하라는 법입니까?』 현직 환경전문교수라는 후보가 단상에 올라와 맨먼저 외친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돈없는 후보가 자신을 알리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선거법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우편함에 팸플릿을 투입하는 경우인데 자체 인력을 통해서는 안되고 우체국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것은 막대한 비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우편함에도 두번 팸플릿이 들어왔는데 모두 같은 여당의원 홍보물이었다. 정보사회를 지향하는 현대 조류에 걸맞지 않게 선거가 정보의 차단속에 치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후보자에 대한 직접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유세장이다. 이 기회도 단 두번 뿐이지만….
16일 오후 4시에 찾아간 신정치 일번지라는 강남 2지구 유세장(청담국교)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요즘 지면에서 잘알려진 일이지만 청중은 시들한데 후보자와 그 운동원들은 자못 열기를 띠고 분주히 움직였다. 순수한 청중보다 운동원이나 동원된 지지자들이 더 많은게 분명했다.
어떤 후보는 제복입은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동원해서 귀하신 유권자들에게 「지리산 생수」를 무료 제공하고 있었다. 유세장의 새 풍경이었다. 그 바람에 파리를 날리는 프로 음료장수 아줌마 처지가 몹시 딱해보였다. 신정치 일번지답게 후보가 일곱이나 출전했고 그 출신도 다양하고 볼만했다. 유권자들이야 관심을 갖든말든 후보들의 경쟁은 이곳의 명성에 걸맞게 치열했다.
환경문제 전문가,도시설계 전문가가 있는가 하면 지사 타입의 도덕운동가도 있었다. 기업과 정당 두곳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몇사람은 우리 정치에서 흔히 보게되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은 환경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물사건」 때문인지 사람들이 요즘 환경 공해문제에 부쩍 관심을 갖게된 것을 알수 있었다. 후보자들도 이 점을 잘알고 있는듯 누구나 환경문제에 일가견을 피력했다. 그중에도 환경 전문가가 서울시민이 마시는 수질현황,국민학교 교실의 공기오염문제 등을 조목조목 설득력 있게 제시할 때는 그쪽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해 모두 진지하게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무소속의 도시설계 전문가는 현재와 미래의 정치상황을 설계전문가답게 냉정하게 분석,조망하고 새로운 대안으로 「무소속연합론」을 제창했는데 다소 이상론에 치우친 감이 있으나 신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정당후보들의 주장이나 화법이 여전히 낡았고 진부하다는 것은 우리 정치 현주소를 고스란히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법은 50년대 처음 지자제가 생겼을때의 화법 그대로였다.
큰 목소리로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연설조가 현대에 전혀 걸맞지 않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그 타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정치현실,혹은 정치인들의 의식 실체가 여전히 일방통행식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당후보의 첫 일성은 「패륜아적(?) 외대사건」이었는데 여당후보로서 제시할 비전이나 덕목이 그만큼 빈곤함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었다.
그 문제는 사안의 시비와 관계없이 여당의 수치는 될지언정 덕목은 될 수 없는 성격의 문제며 더구나 유세장의 메뉴로서는 적합치 않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시예산 집행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해설 및 감독의욕피력은 여당후보로서 그만큼 유리한 이점을 얻는다고 보았다. 두사람의 야당후보도 내용이나 화법은 50년대식이었다. 예술가뿐 아니라 정치후보도 개성이 있어야겠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
자기주장이 없어 보이는 낡은 상황 진단의 되풀이는 듣기에 재미가 없고 어찌보면 다소 위압적이고 고압적인 연설조는 효과 별무였다고 본다. 중산층 지역에서 야당의 존재의의는 시험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치 전반이 시험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관위원장이 개막 인사말에서 「지자제는 어디까지나 지역선거」라는,정부여당이 강조해 마지않는 말을 하긴 했지만 한편 지자제가 비정상적 풍토에 서 있는 우리 정당을 시민의 토양위에 바로 서게하는 좋은 기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면 중산층사회에서 어쩐지 왜소해 보이는 야당의 모습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정치 일번지에서도 동원된 지지자들이 자기후보 연설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여타 지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후보의 연설이 끝났을때 청중은 반도 남지 않았다. 그 모양은 정말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나마 큰 불상사없이 막을 내린게 다행일지 모른다.
유세 순서가 대충 끝날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환경전문가 후보운동원들이 유세장에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줍고 다녔다. 이곳에서 모처럼 발견한 즐거운 광경이었다. 정치는 이제 시작인지 모른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그야말로 기구하게 탄생한 지자제지만 여기서부터 하나하나 정치를 새로 배우고 참여의 질을 높여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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