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정글' 눈을 감고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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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도시는 지금 정보의 정글입니다. 교통표지와 같은 공공정보,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한 상업 간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벽보, 보행로까지 침범한 입간판…. 시민의 눈은 정보 과잉으로 잠시도 쉴 수 없습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상업적인 메시지만 쏟아내는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우리 도시의 간판들은 시각적인 혼란을 일으킵니다. 지나치게 많을 뿐 아니라 크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나 똑같은 재료와 형식의 간판들로 인해 지역의 특성이 가려집니다. 주거 지역에서는 간판이 크고 많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간판은 넘쳐나 평온한 환경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과도한 발광체를 사용한 간판들이 주민들의 시각을 더욱 자극합니다.

인간의 시각정보 처리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간판이 크고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전달 효과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보다 크게, 보다 많이, 보다 강렬한 색을 추구하는 간판들은 개별 정보로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지럽고 복잡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자신의 점포를 부각시키려는 과도한 광고물은 다른 점포의 경쟁심을 부추기게 됩니다. 결국 과다한 정보량은 정보 전달의 효과를 떨어뜨리고 갖가지 도시 문제들을 낳게 되는 겁니다.

도시의 정보에는 위계(位階)가 있습니다. 공공정보는 어느 경우에나 사적 정보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길가에는 사적 정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상업 간판의 홍수에 묻혀 교통표지와 같은 공공정보가 잘 읽혀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모든 정보는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식당의 메뉴판 속에 있어야 할 정보까지 간판에 크게 표시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광고가 공공정보를 압도하는 이런 혼란상은 사고나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간판주들은 간판을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시각에 노출된 모든 시설물과 거리 경관은 사회의 공공자산입니다. 시민의 시선은 간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눈을 감고 길을 걸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리의 표면에 게시된 모든 시각정보들은 강제적인 성격을 띱니다. 이런 이유로 자극적인 간판, 과다 정보로 시민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가로환경은 시각공해임과 동시에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국회 공공디자인 문화포럼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시민들은 우리나라 공공시설물 중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요소를 간판과 옥외 광고물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이제는 시민들이 스스로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 나설 차례입니다. 가까운 일본의 도시들에는 주민협정제도가 있습니다. 주민들이 경관을 아름답게 관리하기로 서로 약속하고 간판에 대한 규율도 자발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간판 문제는 관 주도의 통제로는 한계가 있고 시민이 함께 풀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 도시가 과밀과 과잉정보로 황폐해진 데는 내 정보가 남의 정보를 이겨야 한다는 이기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경쟁의 구도는 이제 절제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의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의 간판이 건물에 잘 어울리고, 이웃 간판과 나란히 공존하며, 도시경관과 조화로울 때 정보전달도 효과적으로 이뤄진다는 인식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선진 도시는 쾌적한 시각 환경을 통해 이뤄집니다.

권영걸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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