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 한인 장기 기증, 장애인 몸으로 8명에 새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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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박명진씨(왼쪽)가 장기를 기증하고 떠난 남편 박세진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딸 주희양과 함께 들여다보고 있다.

미주중앙 위대한 죽음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죽음은 또다른 삶으로 부활한다.

힘겨운 생활고 속에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던 한인 장애인이 죽어서도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는 사랑의 삶을 실천했다.

지난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박세진(47)씨는 샌버나디노카운티 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지만 다음 날 뇌사판정을 받았다. 가족은 곧 박씨의 간과 심장 콩팥 등 8가지 장기를 고인의 평소 뜻대로 다른 환자들에게 나눴다.

박씨의 장기기증은 큰 아들 병곤(13)군이 엄마인 명진(35)씨를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소 '죽으면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남편의 뜻을 막상 실천하는데 아내는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장애인으로 힘들었던 남편을 또다시 힘들게 하는 것만 같았다. 망설이는 엄마에게 아들은 "장기기증은 아빠가 원했던 일이예요. 아빠는 용기있는 사람이예요. 엄마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부인 박씨는 "가슴이 아프지만 남편의 심장이 또 다른 장기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생명을 이어준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며 애써 감췄던 눈물을 쏟았다.

장기기증으로 '사랑의 삶'을 실천한 박씨는 서울대 약대(78학번)를 졸업한 수재. 한국서 약국을 운영하다 의약분업이 발생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그는 지난 2005년 5월 부인과 아들 딸(주희.10살)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미국이었지만 불혹을 넘긴 장애인이 찾아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극히 한정돼 있었다. LA다운타운을 다니며 갖가지 일에 도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식당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던 아내는 심장허혈증에 여성병으로 수술까지 받게 돼 생활고는 악화돼 갔다.

하지만 박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미싱을 배워 다운타운에서 일감을 받아다 일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다. 또 밤에는 남가주한의과대학을 다니며 한의사로서의 꿈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다.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에 끼운 보조기계로 혼자선 층계를 오르내리기도 힘든 장애를 갖고 있던 박씨였지만 자신보다 힘든 전신마비 장애인을 간병하고 도와주는 등 ‘나 이상 다른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했다.

박씨의 한 이웃은 “주위에서 도와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도움을 돌리던 사람”이라며 박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지난 15일 심장을 마지막으로 모든 장기이식 수술을 마친 박씨는 오는 20일 오후 7시 한국장의사에서 장례식을 갖고 화장된다. 사랑은 그렇게 세상에 흩뿌려져 또다른 생명에게 새 삶을 선물한다. 남은 가족들은 비록 앞으로의 삶이 버겁겠지만 남편과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했다.

“사회의 모범이 된 아버지를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준 남편이 자랑스럽습니다. 두 아이를 꿋꿋하게 잘 키울게요.”
“아빠~! 사랑해요.”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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