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기를 거부한 학생/박병석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처참한 기분이었다.
교수출신의 정원식 총리서리가 마지막 강의를 하러갔다가 학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얼굴에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 쓰고 목이 졸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현장에서 같이 쓸려다니는 동안 가슴속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한나라의 총리이기 전에 63세의 한 노교수를 끌고 다니며 뭇매를 가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가.
우리가 이런 지경에까지 오고 말았는가. 정총리서리가 마지막 강의를 하러 가겠다고 할때 조마조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는 임명되자마자 자신의 인간적인 소박한 소원은 이번 학기강의를 마쳤으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3일 「학생생활지도 특강」으로 종강을 하기로 했다.
정총리서리가 지하철을 타고 외대로 갈때까지만 해도 그는 교수기분이었던 것 같았다. 오후 6시30분에 시작된 강의의 처음 분위기가 꺼림직했다. 「정교수」는 강의실 맨뒤에 앉은 4명의 학생들에게 『강의실을 잘못 찾아온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도 속으로 뭔가 짚이는듯 싶었다.
그러나 강의실 밖 복도에서 운동가와 구호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강의는 간간이 학생들의 웃음이 터져나오는 분위기속에서 차분하게 진행됐다.
운동가와 구호로 정교수가 『강의가 힘들다』며 종강의 뜻을 비추자 강의실안의 대학원생들은 『교수님 계속 하세요』라며 수업을 진행시키기를 원했다. 이에 목소리를 높여 강의를 계속하려고 시도했던 정교수는 운동가와 구호소리가 더 커지자 『도저히 안되겠다』면서 『교수의 본분을 다하려 했다는 나의 마음만은 여러 학생들이 알아주기 바란다』며 2시간 강의를 45분만에 앞당겨 끝냈다.
정교수의 『마음』에 감사를 표시하려는듯 박수가 터졌고 2개의 꽃다발과 선물이 증정됐다.
그러나 정총리서리가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계란이 날아왔다. 『교수신분으로 강의하러 왔다』는 정총리서리의 호소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정원식은 물러가라』『귀정이를 살려내라』는 학생들의 구호속에 파묻혀 버렸다. 주먹질을 하는 학생,2단옆차기로 옆구리를 차는학생…그것은 단순한 항의성 시위가 아니었다.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정총리서리는 혁대를 쥐고 양팔을 쥔 학생들에게 멱살을 잡혀 30여분간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마스크를 하고 쇠파이프를 든 학생들이 지키는 정문 옆 사이문으로 겨우 빠져나간 노총리서리는 지나가는 개인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푹 숙인 총리는 오열하는 것은 아닐까.
떠나는 택시의 뒤창으로 그런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이 학생들이 외치는 변혁과 민주화는 어떤 것인지,오늘의 학생운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