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칙서와 오늘/김동수(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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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게도 백성들의 위에 앉은지 19년에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곤궁하게 만들었으니 나의 죄요,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했으니 나의 죄요,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널리하지 못하고 종척만을 높였으니 나의 죄요,뇌물을 주고받음이 공공연하되 징벌치 못했으니 나의 죄요,세계의 열국와 연호함은 시의에 옳으나 시행하는 방편이 어그러져 백성들의 의심만을 더하게 했으니 나의 죄며,만백성의 생업을 뒤숭숭하게 하고 이웃나라에는 신의를 잃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했으니 나의 죄라 비통하고 황망해 진실로 제왕의 자리에 앉은 즐거움이 없노라.』
가톨릭교회의 「내탓이오」운동에 따른 요즈음 얘기는 분명히 아니다. 다만 옛날 우리 사회가 그런 모습을 지닌 시절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케케한 역사적 문서의 단편일 따름이다.
최근들어 그때 그 세월을 떠올리는 사람들과 심심찮게 맞닥뜨리곤 한다.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우리 주변의 국제적 기류와 관련해 흡사한 상황으로 흔히 비유되곤 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시절,구한말 열강들이 다투어 발을 들이밀며 망국의 길목에서 갈팡대던 시절이다.
그때 서슬 퍼렇던 나라님께서 풀죽은 목소리로 고달픈 창생들을 달래기 위해 내린 칙문중 간추린 것이 앞에 인용된 내용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어지러워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종은 이 칙문을 내린다. 열한가지 조목을 들어가며 임금 스스로 과오를 비판하고 자책하면서 모든 백성과 함께 개혁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모두가 더불어(함여) 새길을 가자(유신)고 했다 해서 뒷날 「함여유신」 소칙이라 불린다.
이 곰팡내나는 글발을 뒤적이면서 우리의 몰골을 뜯어보면 1백10년전이나 지금이 무엇이 다를까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불과 지난 얼마동안의 북새통만 가지고도 그런 생각을 떨칠수가 없다.
고종의 자기비판에서 엿보이는 난맥상태의 나라꼴­국가경제의 어려움,사회지도층의 부패와 비리,친인척의 국정농단,무고한 인명의 살상,흉흉한 민심,외세의 각축에 대응하는 외교솜씨 등 꼭 옛날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 하나만 들자면 국정의 책임자가 속셈이야 어쨌든 모든 허물을 혼자 뒤집어쓰고 공개적으로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라고 할까….
어쨌든 당시 국정의 어려움은 요새말로 유행하는 총체적 난국보다는 더욱 심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권을 외국에 넘겨주고 망국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82년은 처음으로 구미와 외교문서를 교환한 해였다. 미국·영국·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닫아걸었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이보다 6년 앞서 일본과는 강화도조약이라는 치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우리의 동방예의지국은 정치·경제적 세력확장을 노리는 이들 국가에는 안성맞춤의 먹이감이었다. 돌아가는 바깥 물정을 몰랐으니 외교적인 흥정을 벌일줄도 몰라 불평등조약 같은 것도 맺을 수 있었고 경제적 이권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외세개입에 더욱 좋은 조건은 다른데 있었다. 나라의 근본이 뒤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나라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구중궁궐속에서는 왕족과 척족들이 권력다툼에 골몰하고 있었다.
정치지도자들은 그러한 권력다툼에 업혀 개화파와 수구파로 갈려 각기 외국세력을 끌어들이는 판이었다. 나라 이익보다는 개인적인 권력,정치적인 야심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관리들은 또 어떠했는가. 그 부패상은 임오군란이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열석달이나 밀렸던 봉급쌀을 겨우 한달치 내주면서 부린 횡포가 군란의 도화선이었다. 관리들의 농간으로 모래섞인 쌀에 그나마 분량도 적은데다 일본식 훈련을 받은 다른 부대 군인에 비해 소홀한 대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요즈음 말로 부패와 분배의 불공평에 대한 저항이었다. 군인이라기 보다는 민심의 저항이었다. 이는 국민과의 다툼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 청이 한반도에 출병하는 길이 열리게 되고 열강틈새에서 헐떡거리던 조선왕조는 결국 해체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왕조의 해체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째 들어먹어 반도내의 창생까지 모조리 침탈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금의 시대적 배경이나 조건은 물론 구한말과는 다르다. 국제적 환경은 유리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1백년전의 불길했던 시절을 연상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정치판 탓인가,정치를 못따르는 국민탓인가.
『정치를 잘하는 자는 백성의 본성에 따라 하고,그 다음은 이로써 이끌고,그 다음은 깨우치며,가장 하등인 자는 백성과 더불어 다툰다』는 말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기준에서 우리가 어느 단계의 정치수준에 있는지 나라에 더 큰 시련이 닥치지 않도록 당장의 아귀다툼에 앞서 모두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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