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페루 - 잉카 유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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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와타나 유적지 스케치

안데스 산맥의 잉카 유적지를 혼자 다니다니다 보면 동양인인 내 주위에서 꼭 벌어지곤 한 이벤트가 있다. 리마.아레키파 같은 페루 대도시에서 온 중학교 단체 수학여행객들과 마주칠 때면 생기는 일이다.

태양을 붙잡아 매어 두는 돌로 유명한 인티와타나 유적지에서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스물다섯 개 정도 되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양 사람이 마냥 신기한 듯 페루인 여중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나를 향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곧 그중 가장 용감한 아이가 다가와 질문을 했다.

"사진 같이 찍어도 되나요?" / "그래."

20여 명의 까무잡잡한 꼬맹이들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아이들의 질문은 항상 비슷해서 대답해야 하는 스페인어는 이미 외우다시피 했다. 이름은 영욱이고, 혼자 여행 중이고, 페루에 한 달 반째 있고, 페루를 '무척' 좋아하며, 페루의 여자들은 '무척' 예쁘고, 재키 찬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 사람이라고 말해 주면 되는 것이다. 대답을 마친 뒤에는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에 돌입한다.

유명 관광지의 분수대처럼 가만히 서서 몇 초마다 바뀌는 꼬맹이들의 어깨에 손을 올려가며 사진을 찍히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된다. 심지어 어떤 관광객은 이벤트가 끝난 뒤 '너 유명한 사람이냐'고 물어 오기도 했다.

이 이벤트는 다음 목적지로의 이동을 재촉하는 인솔 선생님의 압력에 의해 겨우 끝이 맺어지곤 했다. 마지막 관문은 사진을 찍은 녀석들에게 무슨 사인이라도 하듯 e-메일 주소를 일일이 적어주는 것, 그리고 몇몇 용감한 아이에게 "안녕"하고 말하며 볼에다 뽀뽀를 해주는 것이다.

작은 마추픽추 같은 그곳은 아이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 조용해졌다. 정교하게 쌓은 잉카의 벽 위에 걸터앉아 이곳을 건설했을 아이들의 조상을 상상했다.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친 뒤 텅 빈 무대를 바라보는 가수라도 된 것처럼 허전하고 또 허무했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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