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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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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라면은 한자로 납면(拉麵)이라 쓴다. 중국에서는 오로지 손으로만 뽑는 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늘린 뒤 칼로 잘라 내는 절면(切麵)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칼로 썰든 기계로 뽑든 상관없이 밀가루 반죽에 소금 성분의 용액인 간수를 섞어 만든 면이면 모두 라면이라 부른다. 여기에 간장.소금.일본된장 등으로 간을 맞추고 닭뼈나 돼지뼈 등을 고아 만든 국물을 보태면 한 그릇의 일본식 라면, 즉 '라멘'이 완성되는 것이다. 반죽에 간수를 섞는 것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 전래의 면인 우동은 밀가루에 소금과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고 간수를 쓰지 않는다.

라면이 일본의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40~50년대다. 일본군의 침략과 함께 중국에 건너가 살던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중국식 면 요리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라면이 한동안 '시나(支那) 소바' '주카(中華) 소바' 라 불린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지금은 우동과 소바(메밀국수)를 제치고 일본의 국민음식이 됐다. 해외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남자의 경우는 대체로 라면을 꼽는다. 라면의 중독성은 한국인의 김치에 대한 중독성에 비견된다.

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는 계기는 58년의 인스턴트화였다. 닛신 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한 번 삶은 라면을 기름에 튀겨 수분을 제거하는 원리를 개발해 장기 보존과 간편한 조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71년에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는 컵라면을 개발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매년 850억 개가 팔릴 정도로 밥.빵에 이은 인류의 식량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가운데 37억 개는 한국인이 먹어치웠다. 1인당 소비량은 80개로 단연 세계 1위다. 한국에선 일본과 달리 '라면=인스턴트'다. 그래서 가끔 유해론이 제기된다. 하지만 유난스러운 웰빙 붐도 라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하긴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육상선수도 고기 먹고 달린 외국 선수를 제치고 거뜬히 금메달을 따지 않았던가.

라면 유해론에 가장 섭섭해할 사람은 안도 회장이다. 지난 5일 쓰러져 96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사나흘에 한 번은 골프장에 나가는 노익장이었다. 점심 메뉴는 항상 라면이었다. 생전의 그는 "라면으로 건강을 지킨다"고 말했지만 진짜 장수 비결은 자신의 일과 발명품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50년간 매일 라면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외길 애정.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