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서 충분한 돈 입금" 억류 70일 만에 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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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빅토리아항에서 막바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북한 선박 강남5호(上). 선박 수리비 등이 밀려 지난해 10월 말 이후 두 달여 발목이 묶여 있는 선원들은 북한 측이 돈을 지급함에 따라 4일 출항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우리 배이긴 하지만 여기에 갇혀 지낸 지 두 달도 넘었습니다. 금명간 돌아간다고 하니 날아갈 것 같습니다. 새해도 됐는데 빨리 마누라도 보고 자식들도 봐야죠."

3일 낮 홍콩 빅토리아항 앞바다에 억류 중인 북한 화물선 강남5호를 찾았을 때 한 선원은 이렇게 소리쳤다. 비가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24명의 선원은 갑판 위에서 출항 점검을 하며 흥겨워했다. 얼굴은 수척했지만 몇몇은 콧노래까지 불렀다. 노랫가락에선 고달픈 억류생활을 곧 끝낸다는 기쁨과 설렘이 묻어 나왔다.

때마침 홍콩 해사처 소속 순시선 한 척이 다가와 북한 선장에게 서류봉투를 건넸다. 출항을 위해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할 목록이라고 선원들은 귀띔했다. 강남5호는 지난해 10월 25일 입항한 이후 안전시설 미비 등으로 홍콩 당국에 억류됐다. 북한 핵실험 후 유엔이 금지한 불법 물자 수송 가능성과 관련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았으나 특이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강남5호의 홍콩 대리인 격인 토핑엔터프라이즈 대변인은 4일 "지난주 북한에서 선박안전설비 수리 등 지적사항 시정에 필요한 충분한 자금이 입금됐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다른 관계자는 2500t 규모인 이 배가 수리비 등으로 내야 할 돈은 3만 달러며, 여기에 정박료 5000달러, 선원 급식비 등을 합치면 모두 4만 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북한 측이 돈을 지급함에 따라 강남 5호는 4일 밤 출항했다.

선장은 처음엔 인터뷰는 물론 이름을 밝히기도 거부했다. 너무 바쁘기도 하고 인터뷰할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기자가 갑판에 올라 다시 요청하자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응했다. 그는 "세계가 북한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핍박에 단련돼 있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두 달이 넘도록 억류된 이유를 묻자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유엔이 금지한 물자 수송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느냐는 질문엔 침묵으로 응했다. 앞으로 출항 이후 항해 일정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입항 당시 강남5호는 홍콩에서 폐금속을 싣고 대만을 경유해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기간 억류로 모든 일정이 취소돼 바로 북한으로 돌아갈 것으로 알려졌다.

선원들의 고달픈 생활은 억류 직후부터 시작됐다. 홍콩에서 식료품을 실을 예정으로 입항했다 억류됨으로써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로 내려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강남5호는 토핑엔터프라이즈 측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들은 3~5일에 한 번씩 쌀과 채소.양념 등을 작은 보트에 실어 제공했다. 공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수백 달러씩 외상이 쌓여갔다. 토핑엔터프라이즈의 한 직원은 "제공된 부식 중에 김치가 없어 처음엔 선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런 불만은 쑥 들어갔다. 아마 내부에서 불만을 얘기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선원들은 토핑엔터프라이즈를 제외한 외부의 모든 도움은 거절했다. 지난해 성탄절엔 홍콩의 선원(船員)선교회가 이들에게 선물을 전하려 했으나 역시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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