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21. 파티 드레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흰색 울로 만든 원피스 드레스. 1959년 조선호텔에서 열린 가을.겨울 패션쇼에 주부모델인 하영애씨가 입고 나섰다. ‘흰색 원피스 드레스인가 보다’ 하고 작품을 보던 관객들은 깜짝 놀랐다. 그냥 흰색인줄로만 알았던 어깨 숄 안쪽에 검은색 벨벳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의상은 당시 일반인들이 예상치 못했던 검은색과 흰색의 반전효과에 힘입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미스터 스미스는 주말마다 은행 관사에서 열리는 파티의 준비를 내게 맡겼다. 미국에서 오는 귀한 손님들을 위해 나는 테이블 세팅, 칵테일 준비, 좌석 배치, 테이블 위에 놓을 네임카드 작성 등 하나부터 열까지 일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내가 직접 하기도 했다. 요리를 만드는 한국인.미국인들 간 통역도 맡았다. 하루는 파티의 주인 격이었던 미 군정청 재무장관 골든이 내게 수고했다며 집에 가서 얼른 옷을 갈아입고 손님으로 파티에 참석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로라하는 국내외 고관들이 모이는 파티에 손님으로 참석했다. 언제부턴지 나의 파티 매너는 점점 세련돼갔고, 미국 상류사회에 어울리는 교양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파티에 참석하려면 옷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입어야 하는 법! 내가 '디자이너'라는 운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바로 이때였다. 처음 파티에 초대받았을 땐 당장 급한 마음에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기모노를 싼 값에 사서 그 옷감으로 칵테일 드레스와 이브닝 드레스로 만들어 입었다. 나는 여고 시절 배운 패턴 만들기를 기초로 해 나름대로 그린 스케치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지금도 내가 주장하는 바는 요리든 옷 만들기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전문가라면 같은 것을 매번 제한된 시간에 똑같은 수준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날이 갈수록 파티는 더욱 많아졌고, 나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파티를 준비하거나 드레스를 차려 입고 손님으로 참석했다. 그러는 사이 기모노 옷감이 동나 대신 어머니 치맛감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내 손으로 일일이 만들 시간이 모자라 서울 명동에 있는 '뉴-서울'이라는 양장점에 가서 내가 그린 스케치를 주고 그대로 맞춰 입기도 했다.

하루는 미국에서 오래 사셨다는 재무국 국장의 부인 배 여사가 나를 불렀다. 배 여사는 미국에서도 할리우드에 살았다는 멋쟁이로 소문난 분이었다. "미스 노, 당신이 입는 옷들은 어디서 구하는 거지?" 나는 약간 주춤거리며 "거의 제가 만들어 입습니다"고 대답했다. 배 여사는 내 손목을 잡고 미스터 스미스에게 다가갔다. "스매리(미스터 스미스의 애칭), 당신은 정말로 보는 눈도 없군요. 이 애를 보세요. 항상 이렇게 멋진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타나는데, 지금 물어보니 스스로 만들어 입는다고 하잖아요. 여러분, 이 애가 패션 디자이너로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며 주위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미스 노를 디자이너로 만들자고 했다.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결정된다. 배 여사의 이 한마디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내 길을 열었고 나의 반세기를 결정지었다.

노라·노 (디자이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