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울로 만든 원피스 드레스. 1959년 조선호텔에서 열린 가을.겨울 패션쇼에 주부모델인 하영애씨가 입고 나섰다. ‘흰색 원피스 드레스인가 보다’ 하고 작품을 보던 관객들은 깜짝 놀랐다. 그냥 흰색인줄로만 알았던 어깨 숄 안쪽에 검은색 벨벳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의상은 당시 일반인들이 예상치 못했던 검은색과 흰색의 반전효과에 힘입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파티에 참석하려면 옷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입어야 하는 법! 내가 '디자이너'라는 운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바로 이때였다. 처음 파티에 초대받았을 땐 당장 급한 마음에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기모노를 싼 값에 사서 그 옷감으로 칵테일 드레스와 이브닝 드레스로 만들어 입었다. 나는 여고 시절 배운 패턴 만들기를 기초로 해 나름대로 그린 스케치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지금도 내가 주장하는 바는 요리든 옷 만들기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전문가라면 같은 것을 매번 제한된 시간에 똑같은 수준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날이 갈수록 파티는 더욱 많아졌고, 나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파티를 준비하거나 드레스를 차려 입고 손님으로 참석했다. 그러는 사이 기모노 옷감이 동나 대신 어머니 치맛감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내 손으로 일일이 만들 시간이 모자라 서울 명동에 있는 '뉴-서울'이라는 양장점에 가서 내가 그린 스케치를 주고 그대로 맞춰 입기도 했다.
하루는 미국에서 오래 사셨다는 재무국 국장의 부인 배 여사가 나를 불렀다. 배 여사는 미국에서도 할리우드에 살았다는 멋쟁이로 소문난 분이었다. "미스 노, 당신이 입는 옷들은 어디서 구하는 거지?" 나는 약간 주춤거리며 "거의 제가 만들어 입습니다"고 대답했다. 배 여사는 내 손목을 잡고 미스터 스미스에게 다가갔다. "스매리(미스터 스미스의 애칭), 당신은 정말로 보는 눈도 없군요. 이 애를 보세요. 항상 이렇게 멋진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타나는데, 지금 물어보니 스스로 만들어 입는다고 하잖아요. 여러분, 이 애가 패션 디자이너로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며 주위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미스 노를 디자이너로 만들자고 했다.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결정된다. 배 여사의 이 한마디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내 길을 열었고 나의 반세기를 결정지었다.
노라·노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