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500만원 넘게 들어도 아나운서만 된다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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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서울 역삼동의 한 요가 학원. 대학 졸업 후 3년째 방송사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는 이연경(여·27)씨는 이곳서 발성 연습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씨는 오전 9시가 되면 신촌으로 이동해 모 방송사 이름을 딴 아나운서 아카데미(학원)에서 심화과정을 듣는다. 초급과정을 포함해 300만 원짜리 3개월 코스다.

12시10분. 인터넷의 '아나운서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만나 점심을 먹으며 스터디를 한다. 오후 4시엔 강남구 신사동 고급 의상실 거리를 거닐며 시험용 의상을 둘러본다. 이씨는 시험 당일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이곳을 한 주에 2~3차례씩 들른다. 신사동의 맞춤복은 한 벌에 70만원가량 된다.

이씨와 같은 아나운서 지망생들의 하루 일정은 대부분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짜여진다. 아나운서 아카데미는 아나운서 지망생이 크게 늘면서 신촌이나 강남 등에 난립해 있는 상황이다. 신촌과 강남에만 방송3사의 부설 아카데미를 포함해 최근 3년 사이 20여개가 새로 설립됐다. 아나운서 아카데미의 수강료도 만만치 않다. 3개월 기본 과정이 최소 140만 원. 여기에 심화 과정이나 원장 직강 등의 조건이 덧붙으면 500만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이들 아카데미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로 많은 지망생을 모집하기 위해 방송사 시험 문제를 유출하는 등의 물의를 빚기도 했다. 또 합격자를 모셔 특강을 진행하며 고액의 강의료를 주기도 한다. 물론 이 돈은 아나운서 지망생들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다.

▶일명 '아나운서복'으로 불리우는 아나운서 시험용 맞춤복. 한벌에 70~80만원 가량에 판매된다.

하지만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이곳을 떠나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카데미가 아나운서 시험의 최신 경향과 옷매무새, 말투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관문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수강생들은 "실제 아나운서 합격자중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고, 심지어 서너곳을 수료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더구나 방송국의 아나운서 입사 경쟁률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올해 SBS의 아나운서 공개 채용에는 2070명이 응시했다. MBC는 2151명. 하지만 한 해 아나운서로 채용되는 인원은 방송 3사를 통틀어 10여명에 불과하다. 경쟁률이 1000:1에 이르는 셈이다. 그런데도 아나운서 지망생의 숫자는 매년 천여명씩 누적되고 있다.

물론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다닌다고 합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중인 김경미씨(23)는 "돈이 많이 들지만, 합격만 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께서 아나운서만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강남의 학원에서 아나운서를 준비중인 박지은씨(28)는 "방송활동을 하고 싶은데 연예인이 될 끼는 없고,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방송을 하기에 아나운서만한 직업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카데미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합격 후를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고 했다. 이연경씨는 "방송은 누구나 꿈꾸는 직업 무대 아니냐"며 "대중 앞에서 나의 목소리를 전하고 인기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미취업자로 몇년을 지내는 것쯤이야 감수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중 상당수는 '잘 나가는 여성들의 이상 심리'가 베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강남 도곡동에서 아나운서 지망생들의 상담을 자주 했다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박사의 지적이다. 김 박사는 "아나운서 정도는 돼야, 자신의 배경이나 조건과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망생들이 많다"며 "이들은 내가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심리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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